마이크로소프트의 창립자인 빌 게이츠는 만약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가장 먼저 1947년의 벨연구소를 방문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1947년은 현대 전자통신기술의 근간인 트랜지스터가 모습을 보인 때다.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조합하면 전자의 흐름을 특정한 방향으로 조정하는 ‘논리게이트’를 만들 수 있고, 논리게이트를 연결하면 복잡한 논리적 연산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전자기기는 논리연산을 이용하여 복잡한 기능을 수행한다. 트랜지스터가 없다면 현대의 전자통신기술도 없는 셈이다.
트랜지스터뿐만이 아니다. 벨연구소의 DNA는 현대 기술문명 곳곳에 남아있다. 휴대전화의 기반이 된 무선통신, 음악을 즐기는 방식을 바꿔놓은 디지털 음악, 인공위성의 시대를 연 태양전지와 통신위성, 디지털카메라의 핵심 기술인 CCD, 현대적 운영체제의 원형인 UNIX에 이르기까지 현대 문명의 근간을 이룬 수많은 기술이 벨연구소에서 탄생했다. 1960년대 후반 전성기의 벨연구소에서는 12,000명의 박사급 연구자들이 일했으며 노벨상 수상자도 13명이나 배출했다. 벨연구소는 그야말로 20세기를 빛낸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시장 지배의 비결, 압도적인 기술력
업적만 보면 벨연구소는 공공연구기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벨연구소에서 탄생한 수많은 기술들이 몇 수 앞을 내다본 기초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빅뱅이론을 입증한 ‘우주배경복사’도 벨연구소에서 발견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정부기관인 미국항공우주국(NASA)와 헷갈릴 정도다. 메사추세츠공대(MIT)의 총장 찰스 베스트는 벨연구소가 “수 십년 동안 먼 미래를 내다보며 연구해왔으며 가장 훌륭한 과학자들을 고용해왔다”고 회고했을 만큼 과학자들에게는 ‘어떤 연구든 가능한 꿈의 직장’으로 여겨졌다. 연구자들 사이에 “회사가 왜 우리 연구에 돈을 대는지 모르겠다”는 농담이 돌 정도였다.
그러나 벨연구소의 설립 목적은 결코 인류의 행복이나 번영 같은 형이상학적인 가치가 아니었다.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로부터 이름을 따온 데서 짐작할 수 있듯 벨연구소는 벨전화회사를 모태로 탄생한 미국의 통신공룡 AT&T(American Telephone & Telegraph)이 설립했다. 통신 분야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AT&T는 악명이 높았다. AT&T는 통신 관련 기술을 거의 독점한 상태에서 특허권을 무기로 경쟁사를 압박하는가 하면, 경쟁사를 무너뜨리려는 의도로 핵심 계열사를 몰래 인수하거나 설비를 망가뜨리는 ‘물리적인’ 수단도 불사했다.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기술을 선점하고 로비를 펼친 덕분에 AT&T는 100년 가까이 북미 통신시장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물론 AT&T가 냉혹한 수단만으로 정상에 오른 것은 아니었다. AT&T가 행사한 영향력은 독보적인 기술적 혁신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AT&T의 전성기를 연 월터 기포드가 1925년 사장으로 취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벨연구소 설립이었다. 기포드는 통신 분야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려면 AT&T와 계열사의 연구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업집단 전체를 총괄하는 중앙연구소를 설립하여 중복투자를 막고 연구 효율을 올리겠다는 발상이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벨연구소는 모기업의 비전인 ‘모든 형태의 통신이 기계의 도움을 받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건 연구했다.
당시의 통신기술은 최첨단 영역이었다. 당연히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장래에 어떻게 사용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도전적 기술이 필요했다. 장거리 통신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이상적인 전선의 조건을 연구하는 금속공학자, 저렴한 전선 피복을 연구하는 유기화학자, 소리의 반향이나 왜곡을 연구하는 음향학자, 효율적인 네트워크 구조를 산출하는 수학자, 무선통신의 전달 조건을 연구하는 기상학자, 소리와 영상에 대한 심리적 반응을 다루는 생리학자와 심리학자, 새로운 종류의 신호체계를 연구하는 전자공학자까지 거의 모든 분야의 과학자들이 벨연구소에서 일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수준의 대규모 연구기관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전성기의 구글과도 비슷한 위치였던 셈이다.
소통과 팀워크로 빚어낸 아이디어
세계적인 선수만 모은다고 팀이 우승하지는 않는다. 다양한 재능이 하나의 팀으로 움직이려면 내부 소통과 더불어 개성 넘치는 개개인의 에너지를 한데 모아줄 방향성이 필요하다. 초창기의 벨연구소에는 이러한 팀워크가 부족 했다. 자유로운 연구풍토에 힘입어 아이디어는 넘쳤고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다. 1926년에는 유성영화시스템이, 1927년에는 TV 무선전송 기술이, 1931년에는 고음질 스테레오 녹음이, 1933년에는 전파망원경의 기초 이론이, 1937년에는 음성합성장치가 벨연구소에서 탄생했다. 다만 AT&T가 애타게 고대할, 통신산업 전 영역에 걸쳐 거대한 혁신을 이끌어낼만한 학제간 연구는 쉽지 않았다.
벨연구소의 대표적인 발명품, 트랜지스터. 사진은 1947년 개발된 최초의 트랜지스터로, 오늘날의 트랜지스터에 비하면 거대하다.
그러나 경험이 축적되면서 벨연구소의 연구자들은 서로 소통하며 아이디어를 나눌 방법을 찾아냈다. 벨연구소에 입사한 직원은 양장 제본된 200쪽 분량의 노트를 지급받았다. 연구내용과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적을 수 있는 노트였다. 이 노트는 연구실의 탁자에 비치해서 누구나 볼 수 있게 했다. 연구자들은 서로의 노트를 읽어보며 영감을 얻기도 하고, 난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실마리를 찾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노트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면 아이디어를 얻어간다는 표시로 시간을 적고 서명을 남겼다. 노트의 주인을 포함한 누구도 노트에서 페이지를 뜯어내거나 추가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취소선을 긋고 수정할 내용을 쓴 다음 자신의 서명을 남겨야 했다. 마치 오늘날 사용하는 온라인 협업툴과 비슷했다.
벨연구소의 노트는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매개체인 동시에 특허권의 근거자료이기도 했다. 각각의 노트에는 고유번호가 있어서 누가 어느 노트를 사용했는지, 아이디어나 프로젝트가 어떤 경로로 발전해 왔는지 추적할 수 있었다. 이렇게 수집된 방대한 노트에 힘입어 벨연구소는 AT&T를 필두로 한 ‘벨시스템’ 수직 계열 체제에서 두뇌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미국 정부 역시 벨연구소의 혁신적 가치를 인정하고 연구소 예산의 2/3가량을 지원했으며, 이에 힘입어 20세기 내내 벨연구소는 미국이 압도적인 기술력을 축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낭만’의 시기
그러나 영광의 이면에는 어두운 면도 있다. 팔로 알토의 제록스 파크가 그러했듯, AT&T도 벨연구소의 진정한 혁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클로드 섀넌의 정보 이론이다. 섀넌은 벨연구소에 재직하던 시절 1과 0의 신호값만을 갖는 전자 펄스를 이용한 무선통신 방법을 고안했는데, 이는 아날로그 정보를 디지털 정보로 변환한 첫 번째 시도였다. 섀넌은 디지털 정보의 기본 단위인 ‘비트’ 개념을 처음으로 정립하고 디지털 기반의 기술영역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AT&T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리콘밸리의 탄생 역시 뼈아픈 대목이다. 20세기 중반까지도 미국의 연구와 산업 중심지는 동부였다. 벨연구소도 동부인 뉴저지주에 있었다. 오늘날 서부의 실리콘밸리가 미국 첨단산업의 대명사로 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트랜지스터의 발명이었다. 1947년 벨연구소에서 트랜지스터를 공동 발명한 연구자 중 한 명인 윌리엄 쇼클리는 1951년 샌드위치 모양의 접합 트랜지스터를 고안해서 특허를 확보했다. 쇼클리는 야심차면서도 독단적인 성격의 연구자였다. 연설과 강의, 자신의 업적을 포장하는 데 능했던 데다, 정부나 국방부의 고문으로 활약하는 등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언론에서도 트랜지스터를 공동 개발한 존 바딘이나 월터 브래튼보다 쇼클리에 더 주목했다. 쇼클리가 이처럼 대외적인 성과를 독식하려 들자 벨연구소 내에서 쇼클리의 평판도 악화됐다. 결국 벨연구소에서 기회를 잡기 어렵겠다고 여긴 쇼클리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겨서 반도체 연구를 이어갔다.
쇼클리는 자신의 명성과 자금을 동원해서 벨연구소의 동료들을 데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쇼클리가 워낙 독선적이었기에 쇼클리와 함께 일하겠다고 멀리 서부까지 오는 옛 동료는 없었다. 쇼클리는 할 수 없이 인근 대학에서 뛰어난 학생들을 모아서 연구를 진행했다. 이렇게 모인 연구원 중 쇼클리의 독단에 질려서 회사를 뛰쳐나간 8명이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했는데, 이들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모체였다. 쇼클리를 이들을 ‘8명의 배신자’라며 비난했지만, 이들 중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반도체 산업의 리더로 군림해 온 인텔을, 유진 클라이너는 실리콘 밸리 최고의 벤처캐피탈인 KPCB를 설립하여 첨단기술의 주도권이 서부로 넘어오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벨연구소의 명성과 낭만에 가까운 연구 풍토도 서부가 이어받았다.
벨연구소가 한 ‘남 좋은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실리콘 기반 태양전지를 세계 최초로 개발하고도 상업화에 실패해서 태양광 전지의 시장 주도권을 상실하는가 하면, 광섬유를 개발하고도 식기 제조업체인 코닝에 선두 자리를 내줘야 했다. 1970년대에는 휴대전화 기술을 개발하고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 모토로라에 팔아 치우는 바람에 모토로라가 무선통신의 지배자로 부상하는 꼴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벨연구의 모기업인 AT&T는 1984년 미국 정부와의 반독점법 소송에서 최종 패배했다. 결국 AT&T가 분할되는 과정에서 벨연구소도 독립했고,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AT&T에서 갈라져 나온 루슨트 테크놀로지에 인수된 이후에는 상황이 더 악화됐다. 2000년대에 이르면 벨연구소의 연구자는 전성기의 절반 이하로 줄었고 예산 역시 1/3 가량으로 쪼그라들었다. 모기업의 경영악화에 결정타를 입은 탓이다. 연구분야도 대폭 축소되어 생태학과 심리학, 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벨연구소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2016년 노키아가 인수한 후에는 이동통신 관련 기술에만 집중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벨연구소에 1960년대의 ‘낭만적인’ 연구풍토가 다시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벨연구소 소장으로서 고난의 시기를 지켜본 윌리엄 오시어가 언급했듯, “현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만큼 진보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연구소가 구축한 연구시스템은 혁신의 방법론으로서 세계 곳곳의 기업과 연구소에 크나큰 유산을 남겼다. 전성기 벨연구소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모두 성공적이지는 않았고, 어디에 써먹을 지 도통 알 수 없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그러나 용도를 짐작하기도 힘든 이러한 연구 하나하나가 벨연구소의 영광을 가능하게 했다.
벨연구소에 재직하는 동안 트랜지스터라는 이름을 제안한 존 피어스가 이야기했듯, 발명은 ‘유레카’를 외치는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기술이 크게 도약할 때는 정확한 기점을 확인하기 어렵다. 수많은 사람과 아이디어가 모여서 눈에 띄지 않은 채 조용히 힘을 모으다가 우연한 기회에 적절한 문제를 만났을 때 추진력을 얻는다. 벨연구소의 성공 비결은 바로 앞으로 닥쳐올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데 있었다. 오늘날에는 과연 어디가 과거의 벨연구소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