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기 SF 시리즈, 스타트렉에서 묘사된 순간이동. 트랜스포터라는 장치에 들어가면 정보를 스캔해서 물질을 분해해 전송하는 식으로 순간이동을 구현한다. ©Paramount Television/The Kobal Collection
“Beam me up!” 미국의 인기 SF 시리즈, ‘스타트렉’을 상징하는 대사다. 등장인물이 원격 위치에서 스타쉽 엔터프라이즈호로 순간이동하고 싶을 때 사용하는 명령어다. 작중에서 커크 선장을 비롯한 엔터프라이즈 승무원들은 ‘트랜스포터’라고 불리는 장치를 이용해 우주선과 행성 표면을 오간다. 덕분에 엔터프라이즈는 행성 상공에 머물기만 할 뿐, 번거롭게 행성 표면에 착륙할 필요가 없다. 우주선이 접안할 시설이 없는 작고 복잡한 구조물에도 승무원들을 쉽게 보낼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스타트렉의 팬에게 트랜스포터는 시리즈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가장 첫 시리즈부터 가장 최근의 영화판까지 이어진 고유의 설정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트랜스포터는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스타트렉이 첫선을 보인 1960년대만 해도 SF는 B급 문화 취급을 받던 터라 저예산으로 촬영해야만 했다. 게다가 엔터프라이즈의 디자인은 멋지기는 했지만 착륙하기에는 꽤 난감한 디자인이었다. 트랜스포터는 이러한 난점을 한 번에 해결했다. 승무원들이 기계에 들어가는 장면만 보여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스타트렉의 실현되지 않은 미래, 트랜스포터
스타트렉은 ‘미래를 예견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휴대전화, 태블릿 컴퓨터, AR 장치, 화상회의 모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수십 년 전부터 스타트렉에 등장했다. 애플의 아이패드가 처음 상용화됐을 때도 많은 사람이 스타트렉을 언급할 정도였다. 태블릿 컴퓨터를 예견한 작품으로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먼저긴 하지만 스타트렉에 묘사된 태블릿 컴퓨터는 단지 뉴스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작업용 소프트웨어도 구동할 수 있는 훨씬 진일보한 형태였다. 심지어는 극장판에서 등장한 ‘투명 알루미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물질이지만 이마저도 훗날 산화알루미늄 계열의 투명 세라믹 물질이 나오기도 했다.
1993년부터 1999년까지 방영된 시리즈 ‘딥 스페이스 나인’에 등장한 태블릿 컴퓨터. 포토샵과 같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Paramount Television
물론 스타트렉의 작가진이 예언자라서 이런 놀라운 선견지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미국을 대표하는 SF 시리즈로서 당대의 기술적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내는 스토리를 수십 년 동안 써 내려가다 보니 미래지향적인 기술이 언급될 기회가 많았을 뿐이다. 게다가 그 중에서는 실현이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기술도 적지 않다. 앞서 언급한 트랜스포터가 대표적인 사례다. 작중의 트랜스포터는 사람이나 물체를 에너지로 바꾼 후, 이 에너지를 광선 형태로 쏘아 보내서 이를 다시 물질로 바꾸는 원리다. 상세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사람이나 물체가 트랜스포터에 들어가면 이를 스캔해서 정보를 추출한다. 다음에는 목표물을 완전히 분해해서 형태가 없는 물질 흐름인 ‘물질류’로 만들고, 물질류를 다시 순수한 에너지로 바꾼다.
에너지로 바뀐 물질은 빛을 쏘아 보내듯 목표 좌표로 방사되어 목표지점에 이르면 물질로 재조합된다. 극장판 스타트렉의 설정에 따르면 24세기의 기술력으로 5초 내외, 32세기의 기술력으로는 1초 내외가 걸린다고 한다. 물론 빛처럼 쏘아 보낸다는 설정이므로 전송 거리가 무한하지는 않다. 어찌 보면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법칙을 기발한 방식으로 해석한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작중 묘사된 바로는 사람이 트랜스포터로 이동할 경우 자아정체성이 고스란히 유지된다는 점이다. 2001년부터 TV로 방영된 ‘엔터프라이즈’에서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이 “트랜스포터를 사용하면 내가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느낌이다”라고 언급하는데 이는 전송 중 자아정체성이 단절되지 않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내가 옮겨간 것인가, 내가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난 것인가?
이러한 설정을 보면 작가진도 순간이동에 따른 역설을 의식한 듯하다. 트랜스포터처럼 사람을 분해해서 재조합하는 방식으로 순간이동을 구현하면 ‘분해된 사람과 재합성된 사람은 동일한 인물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트랜스포터에 들어간 사람은 일단 분해된 시점에서 물질로 분해되어 ‘죽은’ 것이 아닌가? 물질과 별개의 영혼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물질의 소용돌이로 변화한 시점에서 이미 한 사람을 이루는 의식과 기억은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를 전송해서 재합성한다 한들, 트랜스포터에서 한 사람이 죽고 다른 곳에서 똑같은 사람이 태어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게임 ‘디아블로 4’의 웨이포인트도 일종의 텔레포터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시간 제약 없이 순간 이동하는 방식은 그 편의성 덕분에 여러 게임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았다. ©Blizzard Entertainment
물론 영화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엄청난 기술이 동원되어 사람을 이루는 1028개가 넘는 원자의 상태와 배열을 하나하나 재현하고 기억마저 완전히 동일한 사람을 재합성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송 전과 후의 ‘기억의 연속성’이 유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컨대 목적지에서 재합성된 사람이 전송되기 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자기가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려 전송됐는지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면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작중에서 묘사됐듯 전송 과정의 오류로 다른 사람의 정보와 섞여서, 두 사람이 뒤섞인 괴생명체가 합성됐다면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스타트렉의 다른 기술과 달리 트랜스포터를 이용한 순간이동이 실현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러한 철학적 의문 때문이다.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한 개인으로서 완결성을 유지하는지, 자아란 어떻게 구성되는지, 그리고 삶의 연속성과 죽음은 어떻게 정의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랜스포터는 철학자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영국의 철학자인 데릭 안토니 파핏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개인의 정체성과 합리성을 윤리학적인 관점에서 탐구해 온 그는 트랜스포터를 이용한 사고 실험을 제안한 바 있다. 이 사고 실험은 스타트렉에서 묘사된 트랜스포터와 완전히 동일하다. 스캐너가 당신의 뇌와 몸의 모든 상태를 기록한 후 이를 다른 행성으로 전송해서 완벽히 동일한 유기적 복제본을 만들어 낸다면, 그리고 기억의 연속성과 자아정체성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면 전송 과정에서도 당신의 연속성은 유지될 것이다. 즉 전송 전과 후의 인물이 동일인이라고 한다면 에너지로 전송되는 상태에서도 당신은 살아있어야 한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트랜스포터는 순간이동 장치가 아니라 복제인간을 생성하는 장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송 과정에서 당신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 상태를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파핏의 사고 실험은 다소 불편한 결론으로 이어진다. 만약 전송 전과 후의 연속성을 인정하려면 우리는 별수 없이 심리적 연속성과 신체의 물질적 연속성을 분리할 수밖에 없다. 신체가 완전히 분해되어 물질적인 죽음에 이른 상태에서도 개인으로서 ‘나’는 소멸하지 않은 상태다. 인간과 유사한 인공지능을 만드느니 마느니 하는 21세기에 플라톤 마냥 육신과 독립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순간이동의 본질적인 문제, 자아 연속성
이 문제는 2000년 넘게 철학자들을 괴롭혀 왔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의 배’라는 역설로 사물의 변화 속에서 정체성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테세우스의 배의 내용은 이렇다. 아테네인들은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영웅 테세우스가 탔던 배를 오랫동안 보존했다. 아테네인들은 배를 이루는 나무가 썩으면 썩은 부분을 새 나무로 교체하는 식으로 테세우스의 유산을 유지해 왔다. 판자 하나를 교체했다고 한들 이 배가 테세우스의 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두세 개쯤 더 교체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유지보수를 계속하다 보면 테세우스가 탔던 배에 있던 판자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있을까?
고대 그리스의 꽃병에 묘사된 테세우스의 배, 테세우스는 아테네를 대표하는 영웅으로 플루타르크는 테세우스의 전승을 이용하여 수천 년을 이어올 역설을 제시했다. ©Center For Hellenic Studies, Harvard
리바이어던으로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테세우스의 배를 한번 더 꼬아서 기묘한 난제로 만들었다. 테세우스의 배에서 떼어낸 나무판자 중 살릴만한 것만 남긴 후 원래의 테세우스의 배와 완전히 똑같은 배를 만들었다고 하자. 테세우스의 배에서 판자를 하나씩 갈아 끼워서 만든 배를 A라고 하고, 떼어낸 판자로 만든 새로운 배를 B라고 했을 때 이 두 척의 배 중 어느 쪽이 테세우스의 배일까? 트랜스포터를 이용한 순간이동은 테세우스의 배를 한번 더 꼬아 놓는다. 테세우스의 배에 ‘자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홉스가 제안한 역설에서 두 배 A와 B는 각각 서로를 타인으로 인식할까, 아니면 동일인으로 인식할까? 둘 중 ‘누가’ 진짜 테세우스의 배일까?
2015년 출시된 생존 호러 게임 ‘소마’에서는 게임의 문법을 빌려 이러한 역설을 더욱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이미 발매된 지 한참 지난 게임이라 스포일러의 걱정 없이 이야기하자면, 작중에는 비어 있는 새 육체에 기억과 의식을 이식하는 기술이 등장한다. 게임 진행 중 아무도 없는 심해기지를 탐험해야 하는 플레이어는 위기 상황에 이 기술을 이용해서 새 육신을 얻고 스토리를 이어 나간다. 마침내 종국의 절정에 이르면 플레이어는 무너져 가는 해저 기지에서 탈출하기 위해, 우주로 향하는 로켓을 발사하고 로켓에 탑재된 육신으로 의식을 전송한다.
플레이어가 마침내 끝난다고 안도하는 순간, 화면은 로켓 안으로 전환되지 않고 해저 기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다. ‘나’를 전송하는 줄 알았던 의식 이전 과정이 실은 새로운 육체에 지금까지의 기억만 옮기고 이전의 나는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플레이어와 고락을 함께해 온 주인공 캐릭터가 아무도 없는 해저 기지에 버려진 채 절규하는 동안, 로켓 속의 새로운 캐릭터는 희망을 안고 우주로 향한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누구인가? 소모품처럼 버려진 이전의 캐릭터인가, 결말에 얼굴만 살짝 비친 새로운 육신인가?
게임 소마의 주인공 사이먼 재럿. 이 게임은 독특한 설정을 통해 자아에 대한 철학적 의문을 던진다. ©Frictional Games
트랜스포터는 '물질 자체를 전송하며, 전송 과정에서도 기억과 감각이 유지된다.’는 스타트렉의 설정은 자아 연속성의 역설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다. 그러나 이 역시 앞서 말했듯 육신과 분리된 무언가의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아니면 파핏이 지적했듯 자아는 연속성을 인지함으로써 형성된 허상일 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만 꼬리를 물뿐이다. 순간이동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이유 중 하나는 마치 시간여행처럼 필연적으로 논리적 모순으로 귀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만 이는 의식을 지닌 생물이 순간 이동할 때의 역설일 뿐, 물체의 순간이동에서는 이러한 역설이 일어나지 않는다. 즉 물체에 대해서는 논리적, 윤리적 역설 없이 순간이동을 가정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도 순간이동이 가능하다. 물론 스타트렉에서 묘사되는 방식은 아니다. 스타트렉에서는 물질을 에너지로 바꾸어 전송하는데, 이를 실제로 구현한다면 에너지가 지나치게 커진다. 우라늄의 극히 일부만 에너지로 바꾼 물건이 원자폭탄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자. 순수한 에너지를 물질로 바꾸는 데도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홉스가 한번 더 꼬아 놓은 테세우스의 배 역설. B와 C는 분명 다른 배다. 그런데 둘 중 어느 쪽이 테세우스의 배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테세우스의 역설은 자아를 지닌 존재가 순간 이동할 때의 논리적 맹점을 보여준다. ©José Ramón Alonso
더 큰 문제는 물질이나 에너지가 직접 개입하는 한, ‘순간’ 이동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질량-에너지 등가 법칙에 따라 물질과 에너지는 다르지 않다. 즉 순수한 에너지라고 하더라도 물질과 동일한 물리법칙의 제약을 받는다. 우리가 아는 물리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광속을 넘을 수 없으므로 에너지 역시 광속을 넘어서서 전달될 수 없다. 따라서 물질이든 에너지든 속도는 유한하며, 어떠한 형태로든 ‘순간’ 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스타트렉에서 묘사된 트랜스포터도 순간이동 장치라기보다 이름 그대로 마치 전화와 같은 전송 장치인 셈이다.
양자 기술을 가능하게 한 정보의 순간이동
그러나 물질이나 에너지가 직접 이동하지 않는다면 순수한 정보 자체는 순간이동이 가능하다. 바로 ‘양자 얽힘’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양자 얽힘이란 두 개 이상의 양자의 물리량이 특수한 상관관계를 이루어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도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입자가 회전하는 방향, 즉 스핀이 반대인 두 입자 A, B가 얽힌 상태에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입자 A의 스핀이 +면 B 입자의 스핀은 자동으로 -가 된다. 따라서 두 입자 중 하나의 입자 상태만 관측해도 다른 입자의 상태가 당연하게 확정된다. 물리적으로는 일치하지 않기는 하지만, 자석의 한 극이 S극이면 다른 한쪽은 볼 것도 없이 N극인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두 입자 A, B의 회전 방향, 즉 스핀은 관측 전까지 확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관측 전까지 A, B 입자 모두의 스핀은 +와 -가 중첩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때 A를 관측해서 스핀을 확정했다면 B의 상태도 관측 즉시 당연하게 결정된다. A와 B가 얽힌 상태에 있는 한, 두 입자 사이의 거리를 아무리 멀리 떼어놓는다 하더라도 A의 스핀을 관측하는 즉시 B의 스핀도 결정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A와 B 두 입자가 다른 은하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양자 얽힘을 이용하면 이론적으로는 광속을 초월한 정보 전달이 가능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순간이동’인 셈이다.
양자통신을 이용한 지구 궤도 통신망의 개념도. 양자 얽힘이 실험적으로 확인된 이래, 양자 기술은 실용적인 영역으로 급격히 다가서고 있다. 사람의 순간이동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정보의 순간이동은 가능해진 셈이다. ©Nature Communications Physics
엄밀히 말하면 양자 얽힘을 이용한 정보 전달은 정보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보를 담은 입자가 서로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각각의 입자에 담긴 정보를 양쪽에서 동시에 확인하는 것에 가깝다. 수학적으로 더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두 입자가 하나의 계를 이루어 동일한 파동함수로 표현될 때, 관측에 의해 파동함수가 붕괴되면 각각의 입자가 서로 다른 상태로 ‘분리’된다고 할 수 있다. 관측 전에는 미시적 양자 세계의 특성상 입자의 상태가 확정되지 않고 중첩된 상태로 존재하기에 마치 관측하는 순간 정보가 순간 이동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얼른 상상하기 어려운 이 현상은 실험적으로 확인됐다. 2019년 과학자들은 서로 얽힌 상태의 광자와 컴퓨터 칩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물리적인 이동 없이도 정보를 전할 수 있음을 밝혔다. 2020년에는 미국 로체스터대와 퍼듀대의 공동 연구에서 두 전자 사이의 정보 전달도 실증하여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논문을 게재한 바 있다. 그리고 2022년에는 프랑스의 알랭 아스페, 미국의 존 F. 클라우저, 오스트리아의 안톤 차일링거가 양자 얽힘 실험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스페, 클라우저, 차일링거의 실험은 최근 각광받는 양자통신 기술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이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양자 얽힘 논쟁을 실증적인 증거를 통해 종결했다. 앞서 언급했듯 양자 얽힘은 광속을 초월하여 정보가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현대물리학의 관점에서도 엄청난 모순이다. 정보가 전달되려면 입자든 파동이든 매개가 있어야 하므로 광속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양자 얽힘은 광속을 초월한 정보 전달이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양자 얽힘을 거부하고,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숨은 변수’가 있어서 이들이 양자 얽힘 현상을 매개하므로 광속을 초월한 정보 전달이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세 사람의 실험은 아인슈타인의 숨은 변수 가설이 틀렸음을 보였다. 양자 얽힘은 사람을 이동시키지는 못하지만, 정보를 이동시킬 수는 있다. 오늘날의 양자 기술은 이를 현실 세계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컴퓨팅과 통신에 응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일어나는 유령 같은 작용”이라고 표현한 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현대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ICT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경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