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발견


역사적인 평가나 정치적인 선호는 차치하고 보면, 이스라엘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무척이나 잘 버텨 왔다. 그 비결 중 하나가 과학기술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바이츠만연구소가 있다. 바이츠만연구소는 기초 과학 전반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세계 최고 수준의 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기술이전과 사업화 부문에서의 성과는 괄목할 만하다. 연구소의 특허 통계는 비공개이기는 하지만 기술 라이센싱 수익만 연간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연구개발과 산업이 긴밀하게 연계된 이스라엘 특유의 생태계는 기술 주기가 빨라진 오늘날 특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이츠만연구소의 진정한 유산은 단지 숫자 상의 성과에 있지 않다. 숫자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과 바이츠만연구소의 독특한 역사를 통해 형성된 특징의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그 특징의 형성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을 배경에 두고 있다.



아세톤으로 이스라엘을 건국한 과학자

바이츠만연구소를 이해하려면 연구소의 이름을 따 온 하임 바이츠만의 삶을 따라가봐야 한다. 바이츠만은 현대 이스라엘에서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테오도르 헤르츨, 초대 수상인 다비드 벤구리온과 함께 ‘국부’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벤구리온이 유대인 시오니스트를 조직해 국가의 체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바이츠만은 열강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외교 노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바이츠만은 러시아 제국의 모탈(Motal)에서 태어났다. 당시 러시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제정 러시아의 혹정을 피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진출하는 일이 많았다. 바이츠만 역시 1892년 독일제국의 다름슈타트 공대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1894년에는 베를린공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바이츠만은 베를린에서 시오니즘과 본격적으로 연을 맺고 시오니즘 운동의 핵심 인사로 자리잡았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정치 지형을 보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초기 시오니즘은 노동자와 저소득층에 기반을 둔 좌파적인 정체성 정치의 성격을 띠었다. 바이츠만은 사회주의적 시오니즘 운동에 깊이 관여하며 시오니스트로서 삶의 방향을 정했다.



1904년 영국으로 이주한 그는 약 30년 동안 맨체스터에서 대학 강사 생활을 하며 발효산업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맨체스터대 재직 시절 박테리아를 이용하여 아세톤을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바이츠만은 박테리아를 이용해 합성고무를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나 실험을 거듭해도 합성고무가 아닌 아세톤과 부탄올만 나와 잠시 실패를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가 전화위복이 됐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 극단적인 소모전 양상으로 흐르자 유럽 열강 전체가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영국에서는 화약 부족으로 1915년 ‘포탄 위기’를 겪으며 작전 수행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원인은 원료였다.

영국이 제식으로 채용한 무연 화약인 ‘코르다이트’는 제조 시용매로 아세톤을 사용했는데, 아세톤의 원료인 아세트산칼슘의 주요 수입처가 적국인 독일이었던 것이다. 당시 해군성 장관인 윈스턴 처칠과 군수부 장관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바이츠만의 ‘실패한 연구’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으며, 바이츠만을 해군성 연구소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아세톤 문제 해결을 맡겼다. 바이츠만은 기대에 부응해 1916년 아세톤의 국산화를 실현하고 화약 수급 문제를 해결했다.



바이츠만은 이를 계기로 내각의 주요 인물과 친분을 쌓았다. 동시에 시오니스트로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행보를 본격화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이스트 맨체스터의 하원의원인 아서 밸푸어가 외무장관에 오르자 해군성의 연구책임자로서 명성을 활용해 ‘밸푸어 선언’을 이끌어낸 것이 대표적인 성과였다. 밸푸어 선언으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독립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천명했다.

이에 질세라 영국의 적국인 독일제국 역시 유대인의 지지를 얻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계 공동체 건설을 지지한다며 맞불을 놓으면서, 서방 열강 전체에 팔레스타인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구도가 형성된다. 비록 밸푸어 선언은 그 자체로 유대인 국가 건설을 보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유럽의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 광풍을 피해, 또는 민족국가의 꿈을 안고 팔레스타인으로 대거 이주했으며, 이들은 이스라엘 건국의 토대를 이뤘다.

새로운 국가의 기틀, 교육과 연구

바이츠만을 비롯하여 유럽의 지식 세계를 경험한 시오니스트 과학자들은 새로운 국가에 가장 먼저 필요한 것으로 고등교육기관을 손꼽았다. 그는 시오니즘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며, 유럽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신음하는 아랍 지역의 인민들 역시 연대해야 할 대상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바이츠만은 포용적인 시오니즘을 강조했으며 아랍인에 대한 배척에도 명백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포용의 매개체는 공동의 번영을 실현할 과학기술, 특히 농업과 화학공업이었다. 이에 따라 바이츠만은 1925년 예루살렘에 히브리대학교를 설립하고 교육과 연구에 나섰다. 그러나 히브리대학교만으로 팔레스타인에 충분한 과학기술 역량을 쌓기는 불안했다. 때마침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수립되고 반유대주의가 만연하면서 독일 출신의 유대인 과학자들의 탈출 러시가 이어졌다.

이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한다면 신생국 이스라엘의 과학기술 수준을 크게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었다. 바이츠만은 예루살렘 인근의 레호봇 마을에 마련한 사유지에 유대인 과학자들이 기초과학 연구에만 전념할 연구소를 건설하기로 하고 후원자를 찾아 나섰다. 바이츠만은 교분이 있던 이스라엘 모제스 시프로부터 요절한 아들인 다니엘 시프를 기린다는 명목으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시프 가문 덕분에 자금 문제를 해결하는 한편으로 그는 소프트웨어 구축에도 나섰다. 유럽의 유대인 과학자를 끌어들이려면 유럽,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못지 않을 만큼 자유롭고 도전적인 연구환경을 제공해야 했다. 바이츠만은 그 힌트를 독일 제국의 영웅이자 카이저빌헬름연구소의 핵심 인물인 프리츠 하버에게 서 구했다.


 

이미 두 사람은 1932년 런던에서 만나 연구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유대인이지만 독일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던 하버는, 한편으로 시오니즘의 대의에 공감했다. 하버와의 교류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바이츠만은 카이저빌헬름연구소를 모델로 삼아 연구소 설립 계획을 구체화했다. 그러니 바이츠만이 1934년 팔레스타인에 ‘다니엘시프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연구소를 설립했을 때, 하버를 초대 소장으로 점찍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시 하버는 1차세계대전 당시 모국 독일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집권으로 유대인 동료들과 함께 배척 받는 상황이었다. 하버는 직위를 수락하고 1934년 1월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지만 도착하기도 전에 급성 심부전으로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인류를 위한 과학

하버의 사망으로 불가피하게 연구소의 초대 소장직을 맡은 바이츠만은 연구소가 새로운 국가의 구심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다니엘시프연구소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 남아있던 유대인 과학자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방대한 연구 자료를 수용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연구소는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내실을 쌓아가다 이스라엘 건국 후 시프 가문의 동의를 얻어 바이츠만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고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연구기관으로 자리잡았다. 나치의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국가의 과학기술 기반을 다지는 데 도움을 준 셈이다.

이렇게 기성 인재를 모으는 한편으로 바이츠만은 유망한 젊은 인재를 발굴하고 이들이 자유롭게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를 위해 바이츠만연구소에서 학부와 학과는 행정적 틀만 제공할 뿐, 연구자는 자유롭게 교류하며 학제간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러한 체계는 마치 유명 축구 클럽의 ‘유스 시스템’처럼 외부에서 유입된 인재에 의지하기보다 팔레스타인의 주민으로부터 인재를 키워내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바이츠만연구소의 이러한 철학은 과학교육부가 연구소의 핵심 분과 중 하나라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바이츠만은 소수의 엘리트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기보다 공교육을 통해 일반 대중의 과학적 소양을 향상함으로써 창의적인 인재를 발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연구소의 과학교육부는 다양한 과학 분야의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교사를 위한 석사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한편, 소외계층 교육, 학습 부진아를 위한 교육 등 70개 이상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으로 바이츠만연구소는 독일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도 독일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심연이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홀로코스트였다. 그러함에도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총리와 서독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는 냉전 시대를 헤쳐가려면 두 나라의 상호 교류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출발점이었다.



1957년 바이츠만연구소의 이론물리학과장인 아모스 드 샬릿과 CERN의 소장인 독일 과학자 볼프강 겐트너가 만나면서 이스라엘과 독일 사이에 최초의 비정부 교류가 시작됐다. 드 샬릿의 동료인 슈네르 립슨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드 샬릿과 겐트너 양측은 ‘과학자들은 공동의 대의를 위해 개인적, 국가적 비극을 넘어서라도 협력해야 하며, 기초 연구가 특히 이러한 협력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계기로 카이저빌헬름연구소의 후신인 막스플랑크재단(MPG)과 바이츠만연구소 사이에 협력 관계를 구축한다는 논의가 이어졌다.

이에 MPG의 회장인 오토 한을 비롯한 세 명의 과학자가 이스라엘을 방문했다. 비정부 대표로서는 독일인이 이스라엘을 방문한 최초의 사례였다. 바이츠만연구소는 이들 세 명을 환대했으며 독일 대표단은 이스라엘의 연구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토 한 일행의 방문을 통해 MPG와 바이츠만의 협력이  양측 모두에게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1964년부터 공식적인 상호 교류를 이어나갔다. MPG와 바이츠만연구소의 교류는 서독과 이스라엘이 과거의 앙금을 딛고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물꼬를 텄다.

이러한 일면을 보면 바이츠만연구소는 건국 초기 이상적 낙관주의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연구소에 각인된 보편적 휴머니즘의 관점은 오늘날의 이스라엘에 큰 시사점을 준다. 냉전을 거치면서 이스라엘은 급격히 우경화됐으며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에 대한 정책도 동화에서 배제와 격리로 굳어졌다. 그러나 바이츠만을 포함한 이스라엘 건국자들의 뜻도 그러했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