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발견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연구기관은 어디일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단일 조직으로는 39명을 배출한 ‘막스 플랑크 협회(MPG, Max Planck Gesellschaft)’가 손꼽힌다. 다만 MPG를 단일한 연구소로 봐야 할지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다른 나라의 연구소와는 다른, MPG만의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누구나 들렀다 가는, 자유로운 연구 공간

MPG는 ‘우산 조직’에 가깝다. MPG 자체가 연구소라기보다 독일 전역의 여러 연구소를 한데 묶은 것에 가깝다. ‘협회’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대학이나 기업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 연구소들의 모임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대학이 학술연구를 독점하는 경우가 많다. 공공자금으로 운영되는 정부출연연구기관도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매우 특수한 형태이고, 연구 주제도 정책적 필요에 따라 제한된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자유로운 학술 연구 상당수가 대학 밖에서 이루어진다. MPG를 비롯한 헬름홀츠협회, 라이프니츠협회, 프라운호퍼협회의 4개 연구협회가 그들이다.

독일의 연구협회는 운영 자금 대부분을 공공자금에 의존한다. 이처럼 재정 구조만 보면 국가연구기관으로서 기능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4개 연구회가 정부의 싱크탱크 역할을 할 때도 있지만 정부의 정책에 반하는 연구성과가 나오는 경우도 있고, 아예 사회의 필요와는 상관 없이 연구자의 관심사에 따라 연구가 이루어지는 일도 많다. 이는 독일 정부의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덕분이다. MPG에는 2023년 현재 86개의 연구소가 소속되어 있으며, 독일 연방정부로부터 2조 9000억 원의 지원을 받는다. 주정부의 지원도 따로 있으니 MPG의 연간 운영 비용은 엄청난 수준이다. 그런데도 연구자가 그저 자신의 연구에 싫증나서 다른 연구를 해도 될 정도로 고도의 자율성이 보장된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연구 만큼이나 교육 기능도 중시한다는 것이다. MPG에는 붙박이로 자리를 유지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은 박사후연구원, 초빙연구원, 인턴 등 일시적으로 연구소에 적을 두는 사람들이다. MPG는 이들이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제공하지만 영영 MPG 연구소에 머무를 수는 없다. ‘여기서 오랫동안 연구하면서 성과를 내세요’가 아니라 ‘여기서 좋은 경력 쌓고 다른 곳으로 옮기세요’다. 덕분에 MPG에서는 경력이 화려한 연구자가 끊임없이 배출되고, 이들이 나간 자리에는 신진 연구자들이 계속 들어오는 선순환이 이루어진다.

MPG의 눈부신 성과와 전통은 세계 여러 나라의 연구조직에 큰 영향을 줬다. 일본은 MPG를 본따 이화학연구소(RIKEN)를 설립했으며, 우리나라도 MPG를 모델로 기초과학연구원(IBS)을 설립한 바 있다. 다만 MPG의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MPG는 단순한 연구조직이 아니라 독일만의 경험과 교육 철학이 녹아있는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왜 다른 나라가 아닌 독일에서 MPG와 같은 연구조직이 탄생했는지 알아보려면 100여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독일만의 교육 철학과 연구 풍토를 살펴봐야 한다.

자유로운 지식의 생산을 통한 교육

19세기 독일, 정확히는 독일제국의 전신인 프로이센의 대학은 다른 유럽 대학과 달랐다. 가장 두드러진 점이 교육과 연구의 통합(Einheit von Lehre und Forschung)이었다. 학교는 단지 지식을 전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근대 유럽에서 고등교육은 상류층을 위한 교육이었다. 고전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아는 교양을 함양하는 것, 과거의 모범을 재해석하고 이상적인 전범을 따름으로써 완성된 인격을 갖추는 것이 고등교육의 목표였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칸트가 기존의 지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이래 대학 교육이 큰 변화를 겪는다. 칸트는 이성이야말로 인간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했으며, 모호한 감상과 주관에 기반한 세계관을 보편적인 이성적 세계관으로 바꾸고 싶어했다. 칸트와 그 후계자들이 고전을 감상하는 데 가치를 둔 교육을 배격하고 엄정한 이성을 기반으로 한 지식을 강조한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철학은 프로이센의 중심지인 베를린의 고등교육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우선 의과대학과 같은 전통적인 대학의 보조 학문의 지위에 있던 식물학, 동물학, 광물학, 화학이 개별 분야로 분리되어 철학의 우산 아래 ‘과학적 교육’으로 편입됐다. 다양한 분야의 지식은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모두 동등한 가치가 있으며, 이성적인 활동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교양 교육이라는 관점이었다.

이에 따라 다양한 학문의 커리큘럼과 학위제도가 철학을 기반으로 표준화됐다. 이러한 흔적은 오늘날 자연과학 박사 학위가 ‘PhD(Doctor of Philosophy)’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개혁의 효과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빠르게 나타났다. 대학에 연구소가 신설되고 학생들이 연구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새로운 체제를 갖춘 지 채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독일의 학문은 이웃 프랑스를 앞질렀다. 자존심 강한 프랑스의 학자들조차 독일의 성취를 인정할 정도였다. 여전히 프랑스의 교육 시스템은 직업훈련과 고전 교육으로 양분된 기존의 체제를 고수했지만, 학문적으로는 프랑스에서 독일로 그 중심지가 옮겨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부국강병의 길, 카이저 빌헬름 연구 협회

독일 교육은 근대 교육의 모범적인 사례로 자리잡았지만 어느 면에서는 자기파괴적이었다. 독일식 연구와 교육의 결합은 학문의 통합을 전제로 했다. 학생이 철학부터 자연과학까지 폭넓게 연구함으로써 전인적인 교육을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과학 분야에서 연구가 심화될수록 한 분과가 생산하는 지식이 방대해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각 분야가 별도의 분과로 독립하면서 전통적인 전인교육의 이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대학의 역할은 여전히 교육이었다. 이는 독일제국이 수립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등교육의 역할은 제국의 신민으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모범적인 독일인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빌헬름2세의 최측근이자 베를린의 신학 교수인 아돌프 폰 하르낙은 대학으로부터 연구를 분리하고 싶어했다. 




하르낙의 답답함에는 이유가 있었다. 비스마르크가 사망한 이후, 독일제국은 외교적 실책을 거듭하며 고립을 자초하고 있었다. 러시아와 프랑스, 양쪽에 가상적국을 둔 독일제국으로서는 조금이라도 더 국력을 키우고 무장을 강화해야만 했다. 그러자면 식량과 공업생산량을 끌어올려야 했고, 여기에 필요한 것이 바로 과학과 산업 기술이었다. 만약 실력 있는 연구자를 대학으로부터 독립시켜서 연구의 자유를 보장한다면 교육에 대한 부담 없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데 역량을 쏟아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대학의 교육과 분리된 연구자는 후원자인 황제와 국가, 기업의 필요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빌헬름2세가 하르낙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1911년 1월 11일, 황제인 빌헬름2세의 이름을 따 카이저빌헬름협회(KWG, Kaiser Wilhelm Gesellschaft)가 설립됐다.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하르낙이 ‘연구자에 대한 직접 지원’ 과 ‘연구의 자유’라는 두 가지 원칙을 지키며 연구자를 끌어 모았다. 황제가 직접 후원하는 데다 기업과 금융계의 기부도 이어져 협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1914년 전쟁이 터지자 KWG의 역할은 더 중요해졌다. 당시 독일제국은  지식인층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KWG의 연구자도 예외가 아니라서 일부 연구자들은 기술개발을 통해 독일제국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독가스 개발에 매달린 프리츠 하버다. 심지어 몇몇 KWG 소속 과학자들은 독일군이 벨기에에서 저지른 학살을 변호하기까지 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빌헬름 2세가 퇴위하자 KWG도 잠시 주춤했지만, 새로운 공화국 정부에서도 외형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KWG의 연구 기능은 국가에 분명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르낙이 수립한 원칙도 그대로 지켜졌다. 그러나 나치가 집권하면서 KWG와 연구자들도 나치에 대한 충성을 강요받았다. 그 어려운 시기에 자리를 지키며 KWG를 지킨 이가 바로 흑체복사 연구로 양자역학의 신호탄을 쏘아올리고 당대 과학자들의 존경을 받던 막스 플랑크다.

독일의 연구 유산을 지킨 막스 플랑크

1930년 72세의 나이에 회장직에 오른 플랑크는 힘든 임기를 보내야 했다.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위기로 협회의 운영자금은 크게 줄었으며,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독일 전체를 반유대주의가 휩쓸었다.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은 상당수가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1차대전 당시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프리츠 하버 역시 유대인이자 독일제국의 신민이었다. 플랑크는 열악한 재정을 극복하면서도 나치에 맞서 KWG의 수많은 유대인 동료들을 지켜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수호하려 했던 것은 KWG의 핵심 가치인 ‘자유로운 연구’와 ‘인재에 대한 존중’ 이었다. 

플랑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33년부터 KWG에서는 104명의 연구자가 쫓겨났다. 해외로 망명하는 사람들은 운이 좋은 경우였고, 추방당한 과학자 중 4명은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됐다. 독일의 영웅인 하버조차도 반유대주의에 공개적으로 항의하다가 1934년 바젤에서 살해당하고 만다. 플랑크 역시 나치의 인종주의와 계속 충돌하면서 KWG를 지키고자 노력했지만, 나치의 지속적인 압박으로 1937년 회장직에서 물러난 후 다시 출마하지 않았다. 

나치당의 산하기구처럼 전락하고 말았다. KWG는 나치당의 전쟁에 신기술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잔류한 상당수 과학자들의 저항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종전이 다가오면서 KWG도 점점 와해되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폭격과 전투로 상당수의 KWG 연구소가 폐쇄됐으며 연구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심지어 종전 후 미국은 KWG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모두 관여한 핵심적인 전쟁수행기구라고 판단하여 완전히 해체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의 생각은 달랐다. 영국군에는 전쟁 전부터 KWG의 연구자들과 교류를 유지하던  연구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이들은 플랑크와 그 동료들이 나치 치하에서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잘 알고 있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치의 눈 밖에 나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KWG의 연구 체계와 인재들을 보존하려고 애썼는지 지켜봤다. 플랑크 자신도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하나 남은 아들 에르빈을 잃기까지 했다. 플랑크는 나치에 간곡히 탄원했지만 에르빈의 처형은 아무 예고도 없이 집행됐다고 한다.

영국 측의 지지에 힘입어 KWG의 과학자들은 연구회를 재건하는 데 나섰다. 그리고 KWG의 과학자들은 그 공을 위기의 기간 동안 KWG를 지켜 온 막스 플랑크에게 돌렸다. 플랑크는 새로운 연구회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는 데 동의했으며, 3년의 시간 동안 조직을 재건한 끝에 1948년 2월 26일 괴팅겐에서 오늘날의 MPG가 창립됐다. 설립 과정에서 엿볼 수 있듯 MPG는 KWG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MPG의 기반 자체가 ‘재건된 KWG’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재 MPG의 주요 특징인 자율성과 교육의 중요성 역시 19세기 독일의 교육철학에 영향을 받아 KWG 시절부터 확립된 전통이다. 이는 MPG가 단지 KWG의 유산 위에 세워진 연구조직일뿐 아니라, 독일 특유의 철학적, 정신적 유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연구조직임을 뜻한다. 특히 연구자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전적인 신뢰야말로, KWG와 MPG를 지탱해 온 핵심 요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