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를 만들 때 한 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조립하는 것보다 단위 공정으로 나누어 차체를 이동시키며 연속적으로 작업을 해나가는 방식이, 대량 생산의 측면에서 훨씬 더 효율적인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단계의 화학반응과 정제공정을 거쳐 완제품을 만들어 내는 경우는 어떨까? 역시 대량 생산을 전제로 했을 때 연속 제조공정의 효율성과 경제성이 높다. 다만 눈에 보이는 부품을 조립하는 것보다 훨씬 제어하기 어렵다는 점이 다르다.
LG화학은 세계 최초로 친환경 가소제의 연속 제조 기술 개발에 성공하여 생산성 향상은 물론이고 환경적인 효과까지 여러 측면에서 혁신적인 성과를 만들어 냈다. 기술혁신 신제품 사례에 익숙한 우리에게 LG화학의 공정 기술혁신 사례는 R&D 프로젝트의 기획과 착수 그리고 수행 과정에서 새로운 이해의 시각을 줄 것이다. 2020년 12월 개발에 성공하여 2021년 본격적인 사업화가 이루어지고 큰 성과를 거둔 친환경 가소제 연속 제조 기술은 2022년 50주 차 장영실상을 수상하였다.
글. 이장욱 컨설턴트(씨앤아이컨설팅)
공정 기술혁신의 성과와 의미
가소제란 플라스틱 제품에 유연성을 부여하여 자동차 시트, 완구, 학용품, 벽지, 소파, 매트 등으로 가공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소재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프탈레이트’라는 가소제가 사용되었지만, 환경호르몬 의심 물질 관련 이슈가 나오면서 2000년대 중반 이후 선진국을 중심으로 비(非) 프탈레이트계 친환경 가소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LG화학 역시 고순도 테레프탈산(PTA)을 기반으로 한 친환경 가소제를 제품화하여 생산과 판매를 하였는데, PTA계 가소제는 프탈레이트 가소제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고 제조원가가 높은 문제가 있었다. 기술적인 이유는 뒤에 알아보기로 하고, 공식 기술명인 ‘고순도 테레프탈산 기반 가소제 연속 제조공정 기술’ 개발 성공으로 인해 얻게 된 여러 가지 성과를 먼저 살펴보자.
비용, 효율, 기타 효과 순으로 성과를 정리하면, 우선 기존 생산 방식의 제조 비용을 100이라고 했을 때 연속 제조공정은 63으로 무려 37%의 비용 절감 효과를 얻었다. 생산능력은 기존 연간 11만 톤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 연속 제조공정 개발을 통해 연간 17만 톤으로 늘어나 무려 54%나 생산성을 높였다.
이 과정에서 제품의 대표적 품질 지표인 순도는 99.2%에서 99.6% 이상으로 올렸다. 제품 순도는 가소제가 사용되는 플라스틱 최종 제품의 결함과 연관이 있고 순도가 높을수록 가소제로 인한 결함률이 낮아진다. LG화학에서 생산하는 PTA계 가소제 양만 연간 17만 톤인 점을 생각하면 0.4%의 순도 차이가 어느 정도 의미인지를 어렴풋이 가늠해 볼 수 있다. 요약하면 더 좋은 제품을 생산하며 비용은 낮추고 생산량은 높인 것이다.
위의 성과를 다른 지표의 측면에서 보면, 탄소배출을 기존 공정 100%를 기준으로 46%로 저감 하였고 에너지 사용률 역시 기존 100% 대비 34% 수준으로 낮추었다. 단위 부피당 생산성은 기존 500톤/m3에서 710톤/m3으로 약 1.4~5배 향상하였다. 제품 자체도 친환경 가소제이면서, 만드는 과정 자체도 탄소배출을 줄이고 에너지 사용량도 대폭 줄여 생산효율을 극대화한 이상적인 친환경 공정이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와 같은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투자된 연속 제조공정의 설비 투자비는 얼마나 될까? 무려 연간 17만 톤을 생산하는 설비인데, 기존 회분식(batch type) 설비를 모두 재활용하여 연속공정을 재구성함으로써 생산량 1,000톤당 1억이 되지 않는 설비 투자비로 이뤄낸 놀라운 성과였고, 이는 신규 설비를 제작하는 비용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혁신의 역동적 단계이론에 따르면, 기술기업의 혁신은 제품혁신과 공정혁신으로 나뉘며 중요도나 혁신의 비율이 시기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기술혁신 성공은 제품혁신 사례가 많이 알려지고 공정혁신 사례는 상대적으로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는다. 아마도 공정혁신은 그 가치를 표현하기도, 가치의 크기를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LG화학의 친환경 가소제 연속 제조공정 기술혁신 과정과 성과는 보기 드문 귀중한 사례이다.
상식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한 기술혁신
한 개의 반응기에서 여러 단계의 작업을 순차적으로 하여 완성품을 만들어 내는 방식을 회분식 또는 배치식(batch type)이라 한다. 비유하자면 한 개의 가마솥에서 처음엔 물을 끓이고 재료를 순차적으로 넣고, 불 세기를 올렸다 내렸다가 하면서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한 번을 다 끓여내면 가마솥 하나 분량을 얻을 수 있다. 대량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한 번에 한 가마솥씩 여러 번을 만들거나, 여러 개의 가마솥으로 동시에 끓이거나 해야 한다. 따라서 가마솥마다 일정하게 만들기가 쉽지 않고 생산 비용과 시간, 단위 부피당 생산성 면에서 효율이 떨어진다. 연속식은 이와 달리 여러 개의 가마솥을 연결하여 1번 가마솥에서는 물만 끓여서 다음 가마솥으로 넘기는 방식이고, 각 단계의 가마솥마다 역할이 분담되어 있어 연속적으로 물 흐르듯이 작업이 가능하므로 생산성을 최대로 높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그렇다면 LG화학을 비롯하여 세계 유수의 기업들이 친환경 가소제 생산을 위한 연속공정을 왜 개발하지 않았을까?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할 생각을 안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설탕과 미숫가루에 비유하면 설탕은 물에 쉽게녹아 연속공정에 별문제가 없지만, 미숫가루는 잘 녹지않고 점성이 높아 연속공정으로 만드는 경우 균질하지못하거나 다음 가마솥으로의 이송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연속적으로 생산되는 제품 품질의 균일성을 보장할 수도 없고 심지어는 생산공정 자체가 멈출수도 있다.
거꾸로 말하면 생산공정을 정밀하게 제어하여 품질을 일정하게 생산할 방법만 찾을 수 있다면 연속공정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누구나 아는 상식적인 질문으로부터 기술혁신이 시작된 것이다. 연속식은 안된다는 고정관념이 R&D 과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질문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크든 작든 모든 기술혁신의 시작은 질문이 있고, 이에 답을 찾고자 하는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
기술혁신 성공의 과정과 앞으로의 기대
‘친환경 가소제는 연속공정으로 만들 수 없다’, ‘그렇지만 연속공정으로 만들 수 있다면 생산성을 높이고 비용이 절감되는 효과가 클 것이다’. 이 단순한 명제를 질문으로 바꾸면 ‘연속공정으로 친환경 가소제를 만들 방법은 없는 것일까?’이다.
LG화학의 이성규 연구위원을 비롯한 3명의 공정연구팀이 이 질문에 관심을 가졌다. 프로젝트란 문제 해결 또는 문제 해결 과정이라 부른다. 이 프로젝트에서 문제 해결의 핵심적인 성공 요인을 세 가지 꼽는다면 프로젝트 기획, 실행 과정에서의 소통과 협력 그리고 믿고 기다려 주는 리더십이다.
프로젝트 기획은 대상의 선정, 접근 방법에 대한 개념설계(Concept Design), 구체적인 목표 설정으로 구성된다. 이 프로젝트에서 문제 해결의 대상은 최초 단순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잠정적인 문제가 진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기대효과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하고 접근 방법에 대해 대략적인 아이디어들이 떠올라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난관이 시작되었다. 누구도 시도해 보거나 성공한 레퍼런스가 없었기 때문에 기대효과를 예상하거나 접근 방법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 내는 데 참고할 것이 없었다. 공정연구팀은 여러 가지 형태의 설비, 장치를 컴퓨터 위에서 수백 번 조립해 보고 분해하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신기술의 콘셉트를 잡는 것부터 시작하였다. 규모가 크고 난이도가 높은 프로젝트들은 이 과정이 가장 중요하고 어렵다. 개념설계가 잘못되면 후속 단계들은 아무리 잘해도 의미 없는 일을 열심히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최초로 시도되는 기술이므로 개념설계 이후 그 개념이 적합한지를 확인하기 위해 실험실 규모로 수많은 실험을 통해 적합성을 확인하고, 이를 다시 파일럿 규모로 키워 또다시 검증하고 개선하면서 개념을 현실화해 나갔다. 공정연구팀이 개념을 설계하고 이를 제품개발팀의 전문가들이 실험을 통해 검증하고 다시 개선하는 과정에서, 소통과 협력은 필수적이다.
전문 분야가 서로 다른 전문가들이 소통해서 협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성공의 불확실성이 클수록 협력은 더욱 일어나기 어렵다. 기업 규모가 크고 안정적이라면 유연성이 떨어지고 보수적인 문화가 형성되기 쉽다. 현재를 유지하기도 어려운데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는 유연성은 현재 상태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없으면 발전과 성장도 없다. LG화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창의, 신뢰, 칭찬, 협업을 강조하는 조직문화를 만들어왔다. 이 같은 문화는 구호와 교육만으로 단시간 내 절대 만들어지지 않으며,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번 성공 체험이 누적되어야만 자연스럽게 내재화될 수 있다.
본 프로젝트는 공정연구 3명, 제품개발 3명, 생산기술 2명의 핵심 인원이 참여하였다. 프로젝트의 최종 결과물은 연간 11만 톤이나 생산하는 현장 설비를 뜯어내고 17만 톤의 연속생산 설비로 재구성하여 최적화시켜야만 하는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소통해서 협력이 끌어내져야 가능한 일이므로, 소통과 협력을 기술적 난관 못지않은 중요한 성공 요인으로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뢰의 리더십이 있다. 불확실성이 높을수록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어지고 최종 결정은 어려워진다. 과제를 승인하고 단계별로 중요한 투자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영진의 어깨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두 번의 중요한 Gate Review를 통해 큰 비용의 투자를 결정해야만 했고, 실험실 개발부터 양산 스케일 설비가 완성되기까지 무려 3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완성된 설비로 실증을 하고 운전 노하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했던 문제 대략 4~50개를 해결하는데 다시 1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개발진을 신뢰하고 기다려 주지 않았다면, 연속 제조공정 기술은 실험실 이론으로 그치거나 파일럿 스케일로 가능성을 테스트해 본 기초연구로 끝났을 것이다.
쉽게 할 수 있거나 이미 남들이 한 것을 따라 해서 보다 나은 결과를 얻은 경우는 혁신이라 부르지 않는다. 많은 기술혁신 성공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신뢰하고 기다려 주는 리더십이 있다는 것이다.
기다림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본격적인 상업 생산에 돌입한 2021년 대비 2022년 매출은 약 21% 성장할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그 두 배를 넘는 약 45% 성장을 이루어 냈다. 또한 일부 수입되던 PTA계 가소제 전량을 대체하였으며, 기술적으로는 국내 특허 25건, 해외 특허 98건 출원을 통해 기술을 수출할 수 있는 라이센스를 목표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