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건축의 거장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손꼽히는 인물이 ‘루이스 이저도어 칸’이다. 칸은 전통과 단절된 모더니즘 건축에 의문을 제기하고 전통을 재발견하여 창의적인 현대 건축으로 빚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초창기 걸작이자 백신 연구의 중심지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 바로 샌디에이고 라호야에 광활한 태평양을 내려다보고 자리잡은 소크연구소다.
‘모든 사람을 위한 백신’을 개발한 조너스 소크
소크연구소는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것으로 잘 알려진 조너스 소크가 설립했다. 소크와 세이빈이 연구생활을 시작하던 20세기 초, 미국인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는 소아마비였다. 소아마비는 감염성도 높은 데다 영구적인 불구를 일으키곤 해서 무척이나 치명적이었지만 누구도 이 병의 원인과 치료법을 몰랐다. 소크와 세이빈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는 데 나섰다. 세이빈은 살아있는 바이러스의 독성을 약화한 ‘생백신’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반면 소크는 바이러스가 어떻게 변이할지 모르기 때문에 생백신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바이러스를 완전히 사멸한 '사백신'을 주장했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소아마비 퇴치에는 소크보다 세이빈의 백신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크의 백신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세 차례에 걸친 주사 접종이 필요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부스터샷을 추가 접종해야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백인 중상류층만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소아마비는 중산층보다 빈곤층, 도시보다는 농촌에서 더 유행했기에 소크의 방식으로는 집단면역을 달성하기 어려웠다. 반면 세이빈의 백신은 단 한번의 경구투여로 예방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접종이 간편했고, 약만 나눠주면 그만이었기에 접종을 위한 인프라 부담도 적었다. 실제로 소크의 방식에서 세이빈의 방식으로 전환하자 접종율이 가파르게 늘어났고 예상보다 빠르게 소아마비가 정복될 수 있었다.
물론 소크와 세이빈의 경쟁에서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옳은 싸움은 아니다. 소크의 사백신과 세이빈의 생백신은 각각 강점과 약점이 있기에, 오늘날에는 생백신과 사백신이 필요에 따라 모두 사용된다. 다만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과학자’에게 열광하며 기꺼이 백신 접종에 나서는 사회적 분위기는 분명 세이빈이 아닌 소크의 공이었다. 소크와 그의 지도교수는 소아마비로 고생한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10주기인 1955년 4월 12일에 에 맞춰 백신을 발표했다. 이렇게 이목을 집중시킨 덕분에 나중에는 소크가 대통령과 의회 양쪽으로부터 최고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이어진 소크의 행동은 더 큰 화제를 낳았다. 거액의 제안을 모두 뿌리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특허권을 포기한 것이다. 훗날 소크는 TV 인터뷰에서 오늘날 가치로 수십 조 원을 포기한 이 과감한 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언급했다.
"특허는 없습니다. 태양에도 특허를 낼 건가요?"
태평양을 품어 안은 ‘인본주의적 생명과학’
일약 스타가 된 소크는 바이러스성 난치병을 하나하나 극복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러자면 이러한 구상을 실현할 만한 곳이 필요했다. 바로 연구소다. 기존의 흔한 연구소와는 차별화된 생명과학으로 세상에 공헌한다는 가치를 담은 연구소. 그에게 돈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소아마비 백신이라는 실적과 유명세, 그리고 든든한 조력자가 있었다. 당시의 언론만 보면 소크가 세상의 이익에는 관심이 없고 연구에만 열중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소크는 그렇게 단순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보기보다 야심이 큰 인물이었으며, 이를 위해 자신을 적당하게 포장할 줄도, 인맥을 활용할 줄도 알았다. 미국에서 세이빈이 아닌, 소크의 백신이 먼저 받아들여진 데도 정치적인 영향력이 작용했다. 소크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설립한 ‘소아마비를 위한 국립재단’ 회장인 버질 오코너와 제법 친분이 있었다. 소크의 방식에서 세이빈의 방식으로 전환하자 접종율이 가파르게 늘어났고 예상보다 빠르게 소아마비가 정복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소아마비를 정복한 영웅은 세이빈이 아닌 소크로 기억됐다.
소크는 당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축가 루이스 칸과의 친분을 활용해 자신의 계획을 공간으로 구현했다. 소크와 칸 모두 타향살이하는 유태인인 데다 성향도 비슷하여 잘 통했다고 한다. 소크는 자신의 입지가 탄탄해지자 1960년 칸에게 연구소 설계를 부탁하는 한편, 샌디에이고 시에 실험실 부지를 요청했다. 당시 소크는 미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이었기에 샌디에이고 주민들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연구소 설립에 필요한 재원은 오코너가 재단을 통해 지원했다.
이렇게 탄생한 건축사의 걸작이 바로 소크연구소다. 칸이 설계한 연구소는 조형적인 아름다움도 탁월하지만, 공간배치에 담긴 철학을 들여다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소크는 자신이 지향하는 ‘인본주의적인 생명과학’이 가능하려면 연구소가 인재들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치며 교류하는 장, 소크라테스식 토론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테네 학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요청사항은 칸에게 무척이나 무거운 숙제였다. 6년에 걸쳐 연구소 전체를 완공할 때까지도 연구소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중정을 어떻게 처리해야할 지 몰라 진흙구덩이 상태 그대로 남겨뒀을 정도였다.
정원을 어떻게 만들지는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서로 마주보는 건물 두 동으로 설계된 연구소에서 건물 사이의 공간은 그 의미가 컸다. 건물을 잇는 정원은 양 건물의 연구자들이 이동하는 통로이자 서로 다른 건물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는 교류의 공간이었다. 소크가 꿈꾼 아테네 학당이 펼쳐지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인 셈이다. 따라서 소크연구소의 정원은 상투적이어서는 안 되고 연구소의 가치관이 그대로 반영된 공간이어야 했다. 칸은 멕시코의 건축가인 루이 바라간의 조언을 얻어서 정원을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비워냄으로써 태평양을 벽으로 두는, 장엄한 사색의 공간으로 완성했다.
정원에 인본주의적인 철학이 반영됐다면, 건물의 내부 공간에는 연구 원칙이 반영됐다. 소크는 연구소가 현재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연구소가 과학지식과 연구 풍토,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 발맞춰 언제나 유동적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칸은 이를 위해 소크의 연구 철학에 자신의 미학을 결합했다. 칸은 1955년 발표한 기념비적인 논문에서 공간을 ‘봉사받는 공간’과 ‘봉사하는 공간’으로 구분했다. 봉사받는 공간은 사람이 주거하며 활동하는 공간, 건물의 목적이 되는 공간을 말한다. 연구소에서는 연구실과 사무실, 휴식공간 등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 봉사하는 공간은 건물의 주 공간인 봉사받는 공간이 제 기능을 유지하도록 바쁘게 움직이지만 눈에는 잘 띄지 않는, 각종 기계나 시설물, 배관이 들어선 칸은 두 가지 공간을 목적에 맞게 이상적으로 조합하는 것을 건축 디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소크연구소 설계에도 이러한 구획의 원칙이 적용됐다.
이러한 공간 구획의 의미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연구가 유연하게 현실에 적응하려면 연구활동이 중단 없이 제 기능을 하며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연구실이 제 기능을 하려면 수많은 설비와 시스템이 늘 제때 작동할 수 있도록 상시적인 유지보수가 필요하다. 문제는 이들 연구 지원을 위한 설비의 효율성을 높이겠다고 연구공간에 배치하면 이를 수시로 유지보수하는 동안 연구실 본연의 기능인 연구가 중단된다는 점이다. 사무실에서 업무 중 전기공사를 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칸은 상시적으로 늘 보이지 않게 이루어져야 하는 유지보수 활동을 봉사하는 공간으로 분리함으로써 봉사받는 공간인 연구공간에서는 연구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동시에 봉사하는 공간을 봉사받는 공간의 천정 위 트러스 형태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공간의 독립성과 기능적인 효율성을 동시에 확보했다. 이는 소크연구소의 연구실이 기존의 연구실과 달리 기능적인 요소에 사용자의 생각에 따라 자유롭게 변화하게 했다.
과학 지식이 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주다
소크와 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소크연구소는 20세기 생명과학과 보건의학을 대표하는 연구소로 성장했다. 현재 소크연구소는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한편으로 소크연구소는 과학자들이 지식을 어떻게 창출해내는지 상세하게 보여주는 무대가 되기도 했다. 연구소가 문을 연 지 10년 남짓 지난 1970년대, 프랑스의 과학사학자인 브루노 라투어는 ‘사람들은 흔히 지식의 혁신이 순간적인 영감, 임계점을 넘어서서 무언가 질적으로 변화하는 순간에 터져나온다고 여기는데 정말 그럴까?’라는 오랜 질문에 답하고자 소크연구소의 연구실 내부로 깊숙이 뛰어들었다.
라투어는 외부인이 특정 집단 속에 있으면서도 심리적인 거리를 두고 철저히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했다. 라투어는 생명과학 논문이 탄생하는 과정을 이처럼 인류학적인 방법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교류와 건물의 구성, 행정시스템이 과학지식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라투어는 소크연구소에서의 통찰을 <실험실 생활>이라는 책으로 엮어내고, 이를 통해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이라는 사회학적 방법론을 정립했다.
과학사회학 이론인 ANT는 소크의 백신 연구와 별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소크연구소의 설립 이념과는 절묘하게 맞닿아 있기에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연구실 안에 ‘누가’ 있는지 생각해보자. 보통은 사람만 생각할 것이다. ‘누구’라고 하면 보통 다른 무언가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를 떠올리기 마련이고, 그러한 주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구자들은 연구실의 온갖 사물과 장비, 행정절차, 관리 시스템 등 수많은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오늘의 잘 마무리된 실험의 시료가 다음 논문에 대한 희망으로 들뜨게도 하고, 복잡한 지출결의 절차가 연구의 규모나 목표를 수정하게도 하며, 주기적인 행사가 일상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물과 시스템은 생각보다 ‘능동적’이다.
이제 다시 연구실 안에는 ‘누가’ 있는지 보자. 사람과 사물, 개념, 제도, 그리고 공간 전체가 보일 것이다. ANT는 이처럼 어떤 현상을 일으키는 데 영향을 준 요소들이 주고받는 영향과 맥락으로부터 현상이 어떻게 조금씩 모습을 갖춰나가는지 연구한다. 다양한 요소들이 각자 주체가 되어 관계망을 형성하는 ANT의 방법론은 상시적인 변화, 자유로운 교류와 토론이라는 소크의 연구 철학과도 상통한다.
지식은 어느 한 천재가 아니라 여러 사람과 사물이 뒤얽힌 공간에서 탄생한다. 어쩌면 소크와 칸 역시 생명과학의 아테네 학당, 인본주의적인 과학을 구상하면서 막연하게나마 라투어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소크는 지식이 개인이 아닌 관계에서 탄생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면, 칸은 사람이 아닌 기계와 설비도 연구의 중요한 주체라고 여겼다. 이러한 관점이 반영된 소크연구소는 그 자체로 오늘날의 과학을 한 발 앞서 예견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천재적인 몇몇 개인의 고뇌보다 평이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교류에서 지식이 탄생하는 시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