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혁신 성공사례


 



 


어떤 기술을 이해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술이 있으면 무엇이 좋은지, 없으면 무엇이 안 좋은지를 고객의 관점에서 보면 된다. 어려운 기술의 원리나 이론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그다음은 기존 기술이나 경쟁 기술과 비교해서 얼마나 더 나은 고객가치를 줄 수 있는지를 판단하면 그 분야 비즈니스를 잘 몰라도 사업적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는데 통화 품질이 나쁘다거나, 온라인 게임을 하는데 자꾸 끊긴다면 어떨까?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이지만 상상해 보자. 가까운 미래에 자율주행 자동차가 데이터 송수신이 잘되지 않아 주행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고 위험이 발생한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다. 앞서 예로 든 상황들은 모두 다 전파에 의한 무선통신과 관련된다. 갈수록 무선통신에 의한 데이터 전송 빈도수와 용량이 늘어나는데 오류 없이 통신하기 위한 핵심 부품이 RF(Radio Frequency) 필터이다. 반대로 말하면 RF 필터 없이는 무선통신이 불가능하다. ㈜이랑텍은 2017년 창업하여 RF 필터의 미래를 보여준 기업으로 통신 공용화 망 구축을 가능하게 만든 멀티플렉서라는 RF 필터 개발과 사업화로 22년도 25주 차 장영실상을 수상하였다. 멀티플렉서가 있어 무엇이 좋아지는지, 경쟁 기술과 비교해 얼마나 더 나은 가치를 줄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기술혁신의 레슨 포인트를 짚어 본다.



 


통신을 위한 공용화 망 구축의 필요성

통신 기술을 이해할 필요까지는 없어도 멀티플렉서가 왜 의미 있는 기술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통신에 대한 상식 정도는 필요하다. 한때 우리는 이동통신 기지국이 어느 통신사가 더 많은가 하는 경쟁을 본 적이 있었다.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기지국 수가 많으면 더 좋은 것이라는 막연한 판단을 했었다.

이동통신을 하기 위해서는 전파를 송신하고 수신해야 하는데, 전파를 보낸다고 한 번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기지국이나 중계기가 많을수록 촘촘한 망을 구성할 수 있어 송수신의 품질이 높아진다. 비유하자면 서울 시내 지하철망에 역이 듬성듬성 있는 것과 촘촘하게 구성된 것과 어느 쪽이 목적지에 더 편리하게 갈 수 있을지를 비교해 보면 상상이 될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지하철 사업자가 여럿인데 우리는 그 중 어느 사업자를 하나만 골라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에 한 가지 더, 지하철 사업자마다 보유하고 있는 전동차의 폭 사이즈가 달라 철로를 공유할 수 없어서 각자 지하에 철로를 놓고, 같은 동네지만 역 출입구도 각자 다 따로따로 만들어야 한다면 얼마나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바깥에 설치된 기지국을 자세히 볼 일은 없지만, 건물 내부나 지하에 설치된 중계기는 통신사별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자주 본다. 방금 비유한 지하철역 출입구가 중계기에 해당하며 통신사마다 각자 출입구를 운영한다는 것이다.

4G LTE라고 하는 4세대 이동통신까지는 비효율적임을 알면서도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없어 기지국이나 중계기를 통신사마다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를 묶어서 1개의 기지국을 공용으로 사용하게 되면 주파수 대역 간 간섭이라는 현상이 일어나서 전파 송수신에 문제가 일어나게 되는데, 기술적으로 간섭 현상을 없앨 방법이 없었다. 갑자기 전화가 안 되거나 데이터 송수신이 안 되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느니 차라리 각자 서로 다른 출입구를 사용하는 편이 가장 좋은 대안이었다.


 

문제는 5G 세대로 전환되면서 심각해진다. 5G 무선이동통신은 4G에 비해 동일 시간에 최대 20배 정도 더 많은 양의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성능을 내기 위해서는 4G 중계기가 1개 필요한 면적에 5G는 중계기 18개가 필요하다. 그만큼 촘촘한 망을 필요로 하는데 통신사마다 중계기를 설치해야 한다면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서울 지하철역이 지금보다 18배 늘어나야 하고 그것도 통신사별로 지하철역 출입구를 만들어야 한다면 설치비와 설치 시간도 문제지만 설치 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운영비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이랑텍은 주파수 간섭 현상을 없애 여러 주파수 대역을 하나의 통신장비에서 중계할 수 있도록 해주는 RF 필터인 멀티플렉서를 개발한 것이다. 멀티플렉서를 중계기에 적용하면 일단 구축 비용을 3분의 1로 낮출 수 있다. 지금보다 중계기 숫자가 18배는 늘어나야 성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4G 중계망 구축 비용의 3분의 1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구축된 망은 전력을 사용해서 운영하는데 통신사별로 따로 구축하는 것과 비교해 무려 절반 이상인 53%의 전력 사용량 절감 효과를 가져온다. 이 효과가 실현되면 단지 부품이나 장비의 기술혁신 수준에서 말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아마도 이 분야의 비즈니스를 잘 몰라도 사업적 가능성을 각자 생각해볼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효과일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가져온 기술혁신

통신사나 방송 전파 사업자들, 즉 RF 필터를 필요로 하는 고객들은 서로 공용화 망 구축에 대한 요구가 있는가? 라는 질문과 무선통신 분야의 세계 선두인 우리나라를 제외한 해외에서는 이와 같은 공용화 망 구축에 대한 니즈가 있는가? 라는 질문부터 답을 먼저 하면 두 번 물을 것도 없이 “Yes”이다. 그렇다면 왜 아직까지 공용화망 구축을 위해 주파수 간섭을 해결하는 기술 개발을 하지 않은 것인가? 라는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필요성과 사업성은 국내외 기업들이 인지하고 있으나 지금까지 개발에 성공한 기업은 이랑텍이 유일하다.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RF 필터 시장에는 일본, 중국, 독일등 이랑텍의 경쟁자들이 많을 뿐만 아니라 여러 주파수 대역을 통합한 공용화 망 구축 장비를 만들기 위해 지금도 기술 개발에 도전하고 있다.

그림 2에서 기존 기술은 하나의 주파수 대역만을 송수신하기 때문에 도선으로 안테나와 연결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하나의 안테나로 여러 개의 주파수 대역을 통합해서 사용하려면 주파수 대역과 안테나를 잇는 와이어 접점 구역에 간섭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다. 이랑텍을 포함한 여러 경쟁사들이 기술 개발의 목표를 접점 최소화를 통한 간섭 문제 해결로 두고 접근하였으나 도선 배열을 아무리 바꾸고 접점을 최소화하더라도 모두 시행착오로 끝난 것이다. 현재도 경쟁사들은 기존 기술로 문제 해결을 시도하고 있으나 이랑텍의 이재복 연구소장 겸 대표이사와 개발진은 발상의 전환을 하기로 했다. ‘도선이 문제라면 도선을 없애고 도선의 기능을 다른 방법으로 대체하면 되지 않을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안테나와 도선으로 직접 연결하던 기존 기술을 도선 대신 공용 폴을 적용함으로써 무선으로 신호를 보내 주파수 간섭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것이다. 선이 문제라면 선을 대신할 무엇을 찾는 이런 발상의 전환은 기술이 완성된 이후 성공사례로 듣기에는 쉬워도 막상 개발 당시에는 생각조차 하기 어렵다. 가치공학이나 창의적 문제 해결 방법론인 TRIZ 등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방법이지만 막상 나의 상황에 적용해 생각하긴 쉽지 않다. 자동차에서 진동, 소음, 미끄러짐의 원인이 타이어 때문이라고 타이어를 없앨 생각을 하기 어렵고, 비행기에서 날개는 양력을 얻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저항의 원인이라고 없앨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가치를 만들어 내는 방법은 분야마다, 제품마다 다양하겠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비슷한 것 같다. 세상에 없던 가치를 만들어 내거나 이미 존재하던 가치를 새로운 방식으로 더 쓸모 있게 대체하거나, 이랑텍의 기술혁신은 이 두 가지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새로운 난관에 대한 도전

멀티플렉서의 원형이 된 기술 개발은 2017년도에 이미 완성되었다. 이랑텍을 창업하기 이전부터 개발자였던 이재복 대표가 연구원들과 함께 개발 성과를 창업 초기에 만들었지만 개발 과정 중에는 예상치 못했던 양산 단계에서 제품의 불량률이 높아 반품의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 기업에서 개발의 목적은 양산이다. 양산되지 않는 개발은 작품 활동이다.

양산성 확보를 위해 생산공정 개선과 수율 확보에 대한 기술 개발 노력은 글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당시의 노력과 땀에 대해 간접적으로 이해해 볼 순 있을 것 같다. 훌륭한 기술을 개발하고도 양산성이 확보되지 않아 갈림길에 몰린 창업 초기의 심정은 대표나 직원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이를 잘 극복했기에 현재의 이랑텍이 존재하고 이재복 대표는 함께 위기를 넘긴 임직원들이 자랑스러워 이랑텍은 ‘We대한 회사’라 부른다.

두 번째 난관은 어렵게 개발한 혁신 기술에 대한 세상의 인정이었다. 이미 서로 다른 출입구를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회사의 제품을 믿고 출입구를 공용화했다가 발생할지도 모를 리스크를 감당하고자 하는 고객사는 없었다. 리스크가 너무 커서 검증된 레퍼런스 없이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고객사의 심정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통신사업자가 아닌 통신장비 부품사가 실제 현실 상황에서의 기술 검증을 하기 위해서는 통신사업자가 나서주지 않으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재복 대표는 또 다른 명언을 말해 주었다. ‘세상이 받아주지 않으면 혁신 기술이 되지 못한다.’

두 번째 난관으로 인해 멀티플렉서의 초기 데뷔 무대는 해외에서 시작하였고 출시 첫해인 2017년 매출액은 27억 원으로 출발하였으며, 2020년에는 61억 원으로 2배 이상 올라갔고, 코로나로 인해 매출이 잠시 주춤하였지만 2022년 113억 원을 달성하였다. 이제 레퍼런스가 생겼고 혁신 기술로 세상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베트남에 공장도 증설하고 공정 자동화 및 인도 공장설립 계획도 추진하여 생산량을 2배 이상 향상시키고 있는 현재 2023년의 목표는 230억 원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5G 세대로 접어들었고 세계는 아직도 2G, 3G, 4G 세대를 지나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2G나 3G 세대를 사용하고 있는 국가는 바로 5G로 진화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온 천지가 공용화 망 구축 시장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세대별 진화를 해야 하는 세계의 수많은 국가에서는 하나의 세대가 저물고 또 다른 세대가 열릴 때마다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