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발견



 

세상은 이분법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대립구도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국제관계에서의 미·중대립처럼 굵직한 대립구도부터 일상 속의 ‘찍먹’과 ‘부먹’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종종 세상을 충돌과 대립의 구도로 바라보곤 한다. 아마 대립의 틀이 복잡한 세상사를 선명하게판단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과학과 기술의 영역에서도 대립구도는 늘 있는 일이다. 어쩌면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세상을 단순 명쾌한 이론으로 요약하고 적용하는 것이 과학자와 엔지니어의 일이다 보니 대립과 경쟁이 다른 분야보다 첨예하기도 하다. 이 분야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인 ‘전류전쟁’만 보더라도 무기가 동원되거나 사람이 다치지 않았을 뿐, 경쟁은 냉혹했다.

발전기로 치른 전쟁,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

1884년, ‘제너럴 일렉트릭(GE)’을 창립해 발명가이자 사업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에디슨은 미국 동부의 발전사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는데, 에디슨이 마을마다 설치한 직류발전기가 너무 자주 고장난다는 점이었다. 직류발전기가 발전기 전력 사업의 출발점인 만큼 반드시 개선이 필요했다. 에디슨은 이 중대한 임무를 당시 천재로 기대를 모으던 엔지니어인 테슬라에게 맡겼다. 다른 한편에서는 GE와 함께 미국의 전력산업을 양분해 온 웨스팅하우스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에디슨의 진정한 라이벌 발명가인 조지 웨스팅하우스는 1881년부터 전력산업에 주목했다. 유럽에서 진행된 교류 전기 실험 소식을 접한 것이 계기였다.

웨스팅하우스는 교류 발전의 가치를 간파하고는 1885년 독일의 지멘스로부터 발전기를 수입해서 피츠버그에 연구소를 차렸다. 웨스팅하우스가 창업에 분주한 동안 테슬라는 에디슨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테슬라 역시 아직 유럽에 있던 시절, 전압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문제만 해결한다면 교류가 직류보다 더 다루기 쉽고 유연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교류발전기와 교류전동기 개발에 몰두했다. 에디슨과의 만남은 테슬라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줬다. 에디슨의 막대한 자금력 덕분에 테슬라는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교류발전기 개발을 마무리해서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듯, 바로 이 성공의 순간에 에디슨과 테슬라는 영영 갈라선다. 교류발전기의 권리와 보상을 두고 두 사람의 주장이 엇갈린 것이다. 결국 테슬라는 에디슨이 약속했던 보수를 주지 않았다며 연구소를 뛰쳐 나와 자신만의 전기회사를 차렸다. 웨스팅하우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과 결별한 테슬라와 연합했다. 웨스팅하우스 역시 훌륭한 엔지니어였기에 테슬라와의 결합은 강력한 시너지를 내서 곧 교류발전기를 실용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마침내 1886년 웨스팅하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전기회사를 설립해서 발전사업에 뛰어들었다. 에디슨에게는 아주 나쁜 소식이었다. 냉혹하기로 유명한 에디슨이었으니 괘씸한 마음도 있었을터, 에디슨은 웨스팅하우스의 도전에 거의 중상모략에 가까운 방식으로 대응했다. 에디슨은 교류의 안전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지금도 전기는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데, 아직 검증되지도 않은 교류는 얼마나 위험하겠냐는 논리였다. 에디슨은 교류의 위험성을 알린다고 공개적으로 동물들을 교류 전기로 죽이는 실험을 하는가 하면, 교류를 이용한 전기의자 사형 방법을 제안하기도 했다. 압도적인 자금력과 인지도 차이에도 불구하고 웨스팅하우스는 점점 승기를 잡아나갔다. 현명하게도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의 홍보전에 휩쓸리지 않고 차분하게 교류에 대한 교육을 펼쳤다. 결국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의 점등 계약을 웨스팅하우스가 따내면서 전류전쟁은 7년만에 웨스팅하우스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어 1895년에는 웨스팅하우스가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발전기 계약까지 따내면서 발전사업의 일인자로 올라섰다.

이 싸움에서 진 에디슨의 후일담은 씁쓸했다. 전류전쟁의 패배로 에디슨은 경영 수완을 의심받았으며, JP모건 체이스 금융회사의 설립자이자 에디슨의 성공을 줄곧 후원해 왔던 존 피어몬트 모건도 이를 계기로 에디슨에 대한 지지를 거뒀다. 모건은 에디슨의 GE에서 에디슨을 축출하고 톰슨 휴스턴 전기회사와 합병한 후, 에디슨의 흔적을 지워버림으로써 현재의 GE로 재탄생 시켰다. 에디슨 개인에게는 안 좋은 결말이었지만 GE와 웨스팅하우스 두 기업은 곧 협력관계로 돌아서서 미국의 전력 산업을 지탱하는 양대 기둥으로 자리잡았다. 에디슨이 사라지고 나자 모건의 주도로 GE도 교류 진영에 합류해서 전력망이 통합된 덕분이다. GE는 발전사업을 웨스팅하우스에 내주는 대신 자사의 전력망을 웨스팅하우스의 발전소에 연결해서 송배전 분야의 지배력을 유지했다. 경쟁 관계에서 협력하고 상생하는 관계로 돌아선 것이다.

학자의 자존심을 걸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이익과 직접 연결된 기술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수과학에서도 종종 첨예한 경쟁구도가 나타난다. 과학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세기의 경쟁을 살펴보려면 1927년의 벨기에브뤼셀로 눈을 돌려야 한다. 1927년 10월 벨기에 브뤼셀에서는 이른바 ‘천재들의 회의’가 열렸다. 바로 5차 솔베이 회의다. 솔베이 회의는 벨기에의 화학자이자 사업가인 에르네스트 솔베이가 설립한 솔베이 재단이 운영하는 과학 학술대회다. 현재까지 유지되는 물리학회 중 가장 오랜 전통을 지녔으며, 예나 지금이나 물리학에서 정점에 오른 학자들이 주로 참여하기에 물리학계에서는 권위가 높다.

5차 솔베이 회의는 솔베이 회의의 역사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회의에 참석한 과학자들은 하나같이 현대물리학을 정립하는데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광양자이론과 상대성이론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른 아인슈타인부터 고전물리학과 현대 양자물리학의 가교를 놓은 헨드릭 안톤 로렌츠와 막스 플랑크, 현대 양자물리학의 기초를 다진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파동이론을 정립한 에르빈 슈뢰딩거와 양자물리학의 선구자인 볼프랑 파울리, 폴 디랙, 에르빈 슈뢰딩거, 마리 퀴리 등 이들의 논문만 모아도 물리학의 모든 것을 집대성할 수 있을 만큼 쟁쟁한 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5차 솔베이 회의는 참석자들의 이름값만큼이나 물리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대적인 양자물리학의 표준적인 해석으로 자리잡은 ‘코펜하겐 해석’이 이 회의부터 논쟁거리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코펜하겐 해석이란 보어, 하이젠베르크, 보른 등 젊은 물리학자가 주축이 되어 제안한 양자이론 해석을 말한다. 양자물리학의 모호함을 강조할 때 흔히 언급하곤 하는 ‘관측자의 행위가 입자의 실제 상태에영향을 준다’는 명제가 바로 코펜하겐 해석에서 나왔다. 솔베이 회의 이전,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보른은 이탈리아이 코모에서 열린 볼타 서거 100주년 기념 강연에서 코펜하겐 해석을 발표한 바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코펜하겐 해석의 내용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5차 솔베이 회의는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자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보어의 발표가 끝나자마자, 아인슈타인의 거센 반박이 이어졌다. 고전적인 물리학자로서 물리현상을 표현한 수식은 실제 현상에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한 아인슈타인은 코펜하겐 해석의 ‘확률’ 운운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대체 여러상태가 중첩된 채 존재하는 입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다는말인가?

이는 답이 명확해야 하는 수학 연산 문제를 두고 답이 a일 확률은 x%, b일 확률은 y%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인슈타인이 보기에 물리적인 실체를 두고 확률 운운하는 것은 그저 ‘결과가 모호한 것 보면 무언가 더 있긴한 것 같은데 못 찾겠으니 그냥 확률이라고 하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는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의 반박으로 회의장은 금세 논쟁으로 달아올랐다. 여러 국가에서 온 과학자들이 흥분해서 저마다 자국어로 이야기하며 논쟁에 끼어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의장을 맡은 로렌츠는 당황하며 분위기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며칠이나 이어진 격렬한 논쟁의 승자는 보어였다. 아인슈타인이 보어를 반박하기 위해 내놓은 사고실험은 하나하나 논파당했다. 지리한 논쟁이 이어지자 보다 못한 파울 에렌페스트가 “아인슈타인, 자네가 부끄럽구만. 자네는 예전에 자네의 적들이 상대성이론을 공격했던 것처럼 양자이론에 반박 하고 있잖나”라고 조용히 핀잔을 줄 정도였다. 물론 이후 역사를 알다시피 아인슈타인은 절친했던 에렌페스트의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양자이론의 문제점을 질타했다. 5차 솔베이 회의는 결국 갈등을 봉합하지도 못한 채 아인슈타인과 보어의 명언으로 마무리됐다.

“신은 주사위 놀음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 씨, 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십시오” 보어 이렇게 마무리하면 보어와 아인슈타인이 세기의 라이벌이자 일생의 적처럼 보이겠지만, 흥미롭게도 5차 솔베이 회의 이전까지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며 우정을 쌓아 나가던 관계였다. 1920년 베를린에서 에렌페스트의 소개로 보어를 만나 대화를 나눈 아인슈타인은 고국인 덴마크로 돌아간 보어에게 ‘내 일생에서 당신만큼 함께 있기 즐거운 사람은 없었다’며 호감을 전했다. 보어 역시 아인슈타인과의 대화가 인생 중 가장 큰 경험이었다며 존경심을 담아 화답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재능을 진심으로 감탄하며 존경했던 셈이다.

물론 물리학의 대가답게 두 과학자 모두 논쟁이 끝난 이후에도 학문적 교류를 이어가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당장은 논쟁에서 패배한 아인슈타인도 확률적 양자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고안한 숨은 변수나 EPR 역설과같은 이론을 발전시키면서 양자역학을 한층 정교하게 다듬는 데 일조했으니까. 아인슈타인에 대한 보어의 존경심도 여전했다. 아인슈타인 사후에도 보어는 종종 아인슈타인의 사진을 보며 논쟁하곤 했을 정도였다. 자신의 이론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날카롭게 반박해주는 사람이 아인슈타인뿐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마치 호적수를 잃은 고수가 상대방을 그리워하며 머릿속에서 대련을 펼치는 무협지의 한 장면처럼. 논문에 대한 반박과 방어는 ‘말로 하는 마상창시합’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학문의 세계에서 경쟁이 치열하다는 뜻일 것이다. 에디슨과 웨스팅하우스, 보어와 아인슈타인에서 보듯 공학과 과학은 불꽃튀는 경쟁의 세계다.

물론 모든 경쟁이 이처럼 치열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진화 이론을 둘러싸고 따뜻한 배려와 양보가 넘쳐났던 다윈과 월러스의 미담도 있고, 절친한 사제지간이자 경쟁자이던 브라헤와 케플러의 이야기도 있다. 다만 어떤 관계든, 서로가 있기에 재능이 만개할 수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