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발견


 




우리 뇌는 쉴 틈이 없다. 굳이 현대 사회의 복잡함을 들먹이 지 않더라도 뇌는 늘 바쁘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는 간단한 일조차도 과정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복잡하기 짝이 없다. 몸속의 수분이 줄어서 혈액의 삼투압이 변화하면 뇌 시상하부의 갈증 중추에서 이를 인지하고 수분이 부족하니 빨리 보충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갈증 중추가 비상사태를 선포하 면 뇌의 전 영역이 움직인다. 기억 중추는 이전에 물을 마셨던 곳을 기억해내고 운동 중추는 몸의 근육을 움직여 냉장 고 앞으로 움직이게 한다. 시각 중추와 운동 중추는 실시간 으로 협력하며 물병의 위치와 거리에 맞춰서 손을 움직이게 하고, 컵에 물을 담아 입으로 가져가는 과정을 수행한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저 목이 말라서 물 한 잔 마시는 간단한 일을 했을 뿐이지만, 뇌는 그 단순한 일 하나를 위해 이처럼 번거로운 과정을 하나하나 처리해낸다.

심지어는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을 때조차 가만히 있지 않는다. 흔히 ‘멍 때린다’고 표현하는 상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자극을 받아들일 뿐인 상태에서도 뇌는 활발하게 움 직이며 에너지를 소모한다. 뇌가 호흡이나 심장 박동, 호르몬 조절을 모두 관장하는데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연수나 간뇌가 아니라 의식적인 활동을 관장하는 대뇌 이야기다. 우리가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놀랍게도 대뇌 일부분은 여전히 일을 한다. 쉬지만 쉬지 않는 셈이다.

‘내가 쉬는 게 쉬는 게 아냐’

과학자들에게도 이처럼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역설적 상황이 기이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불과 30년쯤 전만 해도 목적의식이 분명한 의식적 활동이 있어야 대뇌가 활성화된다고 여겼다. 이러한 관점은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이용한 실험에서 엿볼 수 있다. fMRI는 뇌 속에 흐르는 혈액의 양을 실시간으로 측정하는 장치다. 신경세포가 활발하게 활동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그만큼 많은 피가 흘러 들어와야 한다. 따라서 fMRI 영상은 특정 활동을 할 때 뇌 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되는지 보여준다.

예를 들어 뇌의 어떤 부위가 맛을 인지하는지 알아낸다고 해 보자. 우선 음식을 먹을 때 어떤 부위가 활성화되는지 확인한다. 여기에서 음식을 보기만 할 때, 냄새만 맡을 때, 아무 맛도 안 나는 고체를 삼킬 때 활성화되는 부위를 찾아내 제외하면 맛을 느낄 때 활성화된 부위만 남는다. 이런 식으로 과학자들은 뇌 지도를 그려냈다.

그런데 1995년, 미국의 버랏 비스월(Bharat Biswal)이 뇌가 분명 쉬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활성화되는 부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스월은 잡음 신호를 줄여서 fMRI의 해상도는 높이는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뇌 안쪽에서 나오는 느린 파동이 fMRI의 해상도를 떨어뜨린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쉬지만 쉬지 않는 뇌’라는 개념 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비스월이 던진 의문은 2001년 워싱턴대의 마커스 레이클 (Marcus Raichle) 교수가 바톤을 이어받아 해답을 제시했다. 레이클 교수는 뇌에서 언어와 관련된 영역을 찾는 연구를 진행하다가 기묘한 현상을 발견했다. 피실험자가 과제를 수행하기 전에는 부지런히 활동하다가, 정작 수행하기 시작하면 조용해지는 부위가 있었다. 당시에는 이처럼 통 념에 어긋나는 신호를 잡음이나 오류로 여겼지만 레이클의 연구진은 이를 간과하지 않았다. 기존의 연구 자료를 뒤져 가며 정체를 규명한 결과, 내정상태 회로, 또는 디폴트 모 드 네트워크(DMN, Default Mode Network)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내정상태, 또는 디폴트 모드란 말 그대로 기본 설정을 말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기본 설정의 개념을 생각해보자. 기본 설정이란 설정을 달리 바꾸지 않았을 때 기본으로 적용되는 상태를 말한다. 만약 사용자가 설정을 바꾸거나 설정에 영향을 줄만한 데이터를 입력하면 기본 설정은 새로운 설정으로 덮어씌워져서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내정상태란 뇌가 활동하면 비활성화되는 기본 상태를 말한다. 우리 뇌는 아무 일도 하지 않더라도 일정하게 활성화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의미다.

‘내가 무릎을 꿇었던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기본 상태’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 레이클 교수는 후측 대상피질(posterior cingulate cortex), 쐐기전소엽 (precuneus)의 중심부, 내측 전전두피질(MPFC, medical prefrontal cortex)의 중심부 등이 DMN을 구성하는 데 관련됐음을 알아냈다. 후측 대상피질과 쐐기전소엽은 주위 환경 정보 수집을 담당한다. 내측 전전두피질은 감각 정보를 수용하고 변연계(limbic system)와 연결되어 정서적 반응 에 관여한다. 이를 바탕으로 레이클 교수는 DMN이 ‘파수꾼 (sentinel)’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뇌는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 동안 뇌 안팎에서 발생한 정보를 수집하고 평가하면서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작업에 대비하는 셈이다. DMN이 작동하는 시간 동안 사람은 ‘힐링’의 시간을 보낼지 모르지만 뇌는 음식점의 브레이크 타임 마냥 다음 일을 준비하는 셈이다.

레이클의 연구 이후 뇌과학자들은 휴지 상태에서의 뇌 활 동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DMN의 다양한 역할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레이클이 지적했듯 DMN은 쉬는 동안 작동하며 뇌가 언제든 활동할 수 있도록 준비 상태를 유지해준다. 한편으로는 DMN이 자아 성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쐐기전소엽은 마음 속에 여러 장면과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데, DMN이 작동할 때 해마에 기억으로 저장 된 과거의 모습을 미래로 투사해 먼 훗날의 사진을 상상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DMN이 정신 건강 과 밀접히 연관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 환자에게서는 DMN 활성이 감소하는 반면, 조현병 환자는 과도하게 활성화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백일몽을 꾸거나, 문득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거나, 미래에 대한 괜한 망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거나, 다른 사람의 의도를 떠올리는 것 모두 DMN의 역할이다. 모두 아무 의식적인 목적 없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동안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다. 우리가 쉬는 동안 DMN은 이렇게 생각과 주변 상황을 정리하며 우리가 다른 의식적인 활동을 더 잘 할 수 있게 준비한다. 흔히 말하는 머리를 비운 후 생산성이나 창의성이 높아지는 현상이다.

쉬는 동안 깨어있는(resting wakefulness) 독특한 특성 덕분에 DMN은 곧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무엇보다 아무 목적 없는 생각, 즉 명상과 창의성, 건강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신경학적 근거로 유용하게 활용됐다. 무엇보다 DMN이 전하는 메시지는 늘 바삐 사는 현대인에게 울림이 크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라. 그래야 생각을 정리하고 집중이 필요한 일을 더 창의적으로 몰입해서 처리할 수 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결코 노는 시간이 아니다. 더 큰 도약을 위해 준비운동을 하는 시간이다.

정신의 에너지를 회복하는 멍, 그리고 위험을 알려주는 멍

가끔씩 ‘멍 때리는’ 시간이 필요한 이유, 바쁜 일상 중에 캠핑 장으로 훌쩍 떠나 아무 목적 없이 ‘불멍’에 빠져들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도시의 바쁜 일상에 익숙한 사람들일수록 시간을 들여 명상 클래스를 찾고 여행을 갈구하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DMN이 준비시키는 시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고도의 집중을 쏟아붓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는 생각이 충분히 정리되지도 않고, 다양한 생각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파수꾼 역할을 하는 DMN이 작동할 시간이 줄어들면서 우리는 점점 일상의 다양한 자극과 흥미로부터 멀어지는지도 모른다.

다만 DMN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 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한다. 여전히 DMN의 역할은 물론, 그 개념 자체에도 의구심을 갖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분명 휴식 상태에서 뇌가 일정한 패턴으로 활성화되기는 하지만, 실제 이러한 패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능적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여전히 불분명한 점이 많다. 결정적으로 ‘멍한 상태’가 모두 DMN이 작동하는 상태가 아니다. 딱히 멍해질 생각이 없는데 습관적으로 멍해진다면 ‘브레인 포그(brain fog)’를 의심해봐야 한다. 인지장애 상태의 한 종류로, 스트레스가 심하거나 우울증을 겪는 경 우 종종 나타난다. 프레인 포그가 심해지면 성인 주의력 결핍 장애(ADHD)나 조발성 치매로 발전할 수도 있다. 그러니 딱히 멍하고 싶지 않은데 멍하다면 뇌가 힘들다고 아우성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쉬거나 병원부터 찾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