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1


우리나라는 글로벌 톱을 다투는 혁신 강국이다. 블룸버그가 발표하는 혁신 지수(innovation index)에 따르면 2021년 우리나라는 세계 1위에 랭크되어있으며, 세계지적재산권기구 WIPO가 발표한 2022년 Global Innovation Index에서도 세계 6위에 랭크되어 있는 등 R&D 투자, 첨단산업 집약도, 연구개발 인력, 논문, 특허 등 투입과 1차 산출 측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창출해 왔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출현과 함께 산업기술혁신의 양상이 복잡하게 진행되면서 지금의 R&D 거버넌스에 대한 한계가 드러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혁신생태계의 활력이 저하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R&D 거버넌스는 ‘압축성장에 최적화된 추격형 모델’로 요약될 수 있는데, 복잡하고 다원화되는 혁신생태계에서 다음과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노출하고 있다.

첫째, 현재의 분절적 거버넌스는 새로운 종류의기술혁신에 대한 수용성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지금의 R&D 거버넌스는 전통적인 산업관점에서 정부부처별로 고유한 역할을 구분하는 칸막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개별 정부 부처들은 고유한 핵심 이해관계자 집단을 가지고 있다.예를 들어, 교육부는 대학이, 산업부는 전통산업과중견기업이, 과기정통부는 출연(연), 개인 연구자,방송통신사업자가 주요한 이해관계자이다. 이러한도메인 중심의 거버넌스는 개별 부처가 주요 이해관계자 집단에 포섭되어 그들의 의견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한다. 이 같은 구조는 조선, 건설, 제조 등 변화가 크지 않은 전통산업에는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융복합 산업이나, 디지털 서비스업처럼새로운 종류의 산업이 출현하게 되면 이들 신산업의 이해관계를 대변해 주는 부처가 없기 때문에 신산업에 속하는 기업들은 그림 1처럼 거의 모든 부처를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러한 분절적 거버넌스는 부처별 칸막이 행정을 가속화하고 이로 인한갈등 조정 비용을 민간 기업에게 전가한다는 구조적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둘째, 혁신 주체의 균형 있는 참여가 필요하다. 혁신생태계는 모든 혁신 주체의 참여를 기본 전제로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대기업을 의도적으로 정부 주도의 혁신생태계에서 배제하면서 반쪽짜리 혁신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대기업을 정부R&D 시스템에서 배제하는 논리는, 정부의 세금이들어간 국가 R&D로 대기업을 지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R&D가기본적으로 위험을 감내하는 과정이라는 점과 R&D에서도 규모의 경제(Economy of Scale)가 유효하다는 점, 그리고 대기업도 혁신생태계를 구성하는중요한 혁신 주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물론, 대기업이 문어발식 확장을 하면서 중소기업과 직접적인 경쟁을 하면 그들의 시장을 잠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공정한 경쟁을 위한 정부의 개입은 필요하다. 하지만, 최근 논의되고 있는 전략기술처럼 특정 기술 확보에 국가적인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면 규모의 경제를 실현할 수 있는 대기업의참여가 불가피하다.

우리나라의 대형 국가 R&D 사업들을 살펴보면 모든 혁신 주체의 조화로운 참여가 중요하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1991년 시작된 G7 선도기술개발사업은 국내 과학기술을 선진 7개국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야심찬 계획하에 정부예산 1조 5,710억 원과 민간투자 1조 9,619억 원등 총 3조 5,329억 원을 투입하는 초대형 국책사업이었다. 삼성, 금성(LG), 현대, 제일제당(CJ) 등 여러 기업들이 참여한 G7 사업은 1994년 삼성전자의256메가 D램 세계 최초 개발과 1996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 성공, 2001년 세계 최초 40인치 TFT LCD 개발 등 다양한 결과물을 쏟아냈다. 이 밖에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3세대 플러스형 신형경수로를 수출하는 등 국내 연구개발(R&D)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고등기술연구원 G7 사업으로 5조 1천억 원(1995년 불변가격 기준)의 매출 및수출실적을 올린 것으로 분석했는데, 이 같은 수치는 이 기간 GDP 증가분 190조 원(1995년 불변가격기준)의 2.7%에 해당하는 것이다. 글로벌 프론티어사업도 마찬가지이다. 

현재 현대자동차가 현재 수소자동차 기술을 선도하고 있지만 그 원천기술은 글로벌 프론티어 사업을 통해 확보된 것이다. 혁신생태계는 자연생태계처럼 다양한 종류의 혁신 주체가참여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시너지를 만들어 내고 이를 통해 더 큰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곳이다. 여기서는 민첩하게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여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 내는 스타트업도 중요하며 풍부한 자원을 통해 장기간 R&D에 꾸준히 투자할 수 있는 대기업도 필요하다. 생태계적 관점에서 각각의 역할이있는 것이다.셋째, 산학연 협력을 촉진하지 못하는 정책도 문제이다. 우리나라는 대학, 출연(연), 기업, 정부 등혁신생태계를 구성하는 개별 혁신 주체의 역량이 뛰어나나 산학연 협력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한계를가지고 있다.
European Innovation Scoreboard 2019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혁신 협력(innovationcollaboration)은 2010년에 179.6점을 기록한 반면2018년에는 이 점수가 134.9점으로 무려 44.8점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중소벤처기업부가 조사한 중소기업 실태조사에서도 자체적인 내부 연구개발 비중은 증가하는 반면 산학연 협력 등 혁신 협력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같은 산학연 협력 동인 저하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산학연 협력에 대한 정책적 이해도 부족이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이다. R&D의 특성과 기술가치, 산학연 협력의 기제에 대한 무지 때문에 정부 정책이 산학연 협력 활성화와 반대로 가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기술이전에 대한 인센티브와 유사 중복 R&D 과제에 대한 지나친 엄격함이다. 2017년 소득세법 개정을 통해 연구자가 기술사업화를 위해 특허권을 이전할 때 발생하는 소득에 기타소득이 아닌 근로소득을 적용하였는데 이로 인해 연구자는 4배 높은 세율과 30~50%에 달하는 간접비를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대학이나 출연(연)에 있는 연구자가 수월성 있는 연구성과를 창출하여 이를 기업에 이전하는 것이 산학연협력의 중요한 축인데 이에 대해 과세 부담을 높이는 것이 큰 틀에서 볼 때 좋은 정책인지 의문이다. 대형 기술이전 실적을 창출하여 스타 과학자를 육성해도 모자랄 판에 기술이전 소득에 대한 증세가 정말 시급한 정책인지 경중을 가릴 필요가 있다. 이후관련 법 개정을 통해 300만 원으로 설정되었던 발명보상금 비과세 한도가 500만 원으로 증가하였으나 산학연 협력을 촉진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수준이다. 까다로운 유사 중복과제에 대한 관리도문제다. 중장기적 기초연구를 지향하는 대학과 당장 적용할 수 있는 ready-made 기술을 원하는 기업 간 간극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간극을메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연구실 단위의 실험조건과 기업이 원하는 양산조건에서의 상황이 상이한 만큼 스케일업 R&D를 통해 기술의 TRL을 높여 기업이 기술을 이전받기 편하게 도와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현재는 유사 중복과제에 대해 꼼꼼하게 가려내는 것이 중요한정부 R&D 선정기준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유사중복인 스케일업 R&D는 살아남기 힘들다. 산학연 협력의 매개 역할을 하는 스케일업 R&D가 추진되기 힘든 상황인 것이다. 지금의 R&D 거버넌스는 우리나라가 단기간에 괄목할 만한 압축성장을 이루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새로운 기술혁신 환경은 현재의 R&D 거버넌스의 혁신생태계에 상당한 수준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먼저, 정부 거버넌스 차원에서는 분절적 칸막이식 행정체계가 혁신되어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공약을 통해 제안한 디지털 플랫폼 정부처럼 종적으로 작동했던 여러 부처들이 횡적으로 협력하여 정책적 시너지를 창출해야 한다. 정부 조직이 민간기업들이 추진하고있는 매트릭스 조직처럼 작동해야 한다는 것인데, 임무 중심 R&D가 이 같은 플랫폼식 정부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별 부처의 이해관계에 포섭되지 않은 국가적 이슈를 임무로 설정하고 대학부터출연(연), 중소기업, 대기업 등 다양한 혁신 주체가이러한 임무를 해결하는 데 힘을 모은다면 현재의R&D 거버넌스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활력 있는 혁신생태계 구축을 위한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다. 기술이전을 촉진하여 스타과학기술인을 배출할 수 있는 파격적인 인센티브 체계, 스케일업 R&D처럼 여러 혁신 주체가 협력할 수있는 장(場)이 필요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하듯, 새로운 R&D 거버넌스를 통해 활력 있고 지속가능한 혁신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