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발견


 



 

고전적인 경제학에서는 사람들을 ‘합리적 소비자’로 가정한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적’이란 비용과 편익을 비교하여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동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소비는 합리적인 방식으로만 일어나지 않기에 경제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이작 뉴턴과 같은 천재도 조폐국장 시절, 버블장에서 40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큰 손실을 보고는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사람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고 탄식하지 않았던가. 
그러한 점에서 최근의 소비 트렌드는 무척 흥미롭다. 바로 의미와 가치에 무게를 둔, 미닝아웃이다. 미닝아웃은 자신이 지닌 생각이나 가치관(meaning)을 겉으로 드러내는(out) 소비 행태를 말한다. 미닝아웃은 경제적 편익 이상으로 기업이나 제품에 대한 가치를 중시하는 소비이기에 가치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비합리적인 소비로 보인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를 일시적인 유행으로 치부하거나 지속가능하지 않은 소비방식으로 여기곤 한다. 금전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가치소비가 가능하겠냐는 이유다.

‘이심전심’하는 뇌

비용과 편익의 대차대조표로만 따지면 이처럼 가치를 소비하는 행태는 분명 이상하다. 가치를 표방하는 기업 중에는 제품의 품질이나 기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제품에 실망하는 한편으로는 그 제품을 구매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고 구매한다. 대체 왜 이렇게 굳이 ‘남 좋은 일’을 기꺼이 하려 드는 것일까? 
뇌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미닝아웃이나 기부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가치에 공감하고, 이를 위해 기꺼이 부담을 지려는 성향은 진화를 통해 발전해 온 우리의 뇌가 ‘시키는’ 행동이다. 이 놀라운 사실은 우연히 밝혀졌다. 1990년대 초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갈레세 박사의 연구팀은 생각이 행동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연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구 중, 놀라운 모습이 관찰됐다. 원숭이 한 마리가 다른 원숭이의 행동을 그저 보고만 있었는데도 직접 행동할 때와 거의 비슷하게 신경계가 활성화된 것이다.

갈레세는 다른 개체의 행동을 모방하는 신경계라는 점에서 여기에 ‘거울 뉴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이어진 연구를 통해 거울 뉴런이 학습과 공감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어진 후속 연구에서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의 쟈코모 리졸라티 교수는 거울 뉴런이 ‘관찰자가 자신의 내부적 상황을 마치 자신이 실제 그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둘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나의 상태를 시뮬레이션하는 셈이다. 
저명한 뇌과학자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박사는 거울뉴런이 ‘DNA 이후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고 평가했다. 왜 그럴까? 현생 인류의 뇌 용량은 250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인류가 도구를 만들고 지금과 같은 문명의 토대를 이루기 시작한 때는 4만 년 전이다. 라마찬드란 박사에 따르면 4만 년 전에 일어난 인류사의 빅뱅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가 바로 거울 뉴런이라고 한다.
만약 거울 뉴런이 단순히 남의 행동을 모방하는 데 그쳤다면 라마찬드란 박사가 이토록 고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울 뉴런은 단순한 동작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거울 뉴런은 행동의 맥락을 파악하여 반응의 강도가 달라진다. 예컨대 식탁이 깨끗하게 준비된 상황과 어질러진 상황에서 컵을 집어드는 행위를 관찰하면 거울 뉴런이 전자에 더 크게 활성화 된다. 식욕이라는 근원적인 본능에 더 밀착한 물을 마시는 행위를 거울뉴런이 정황 정보로부터 유추하여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맥락을 읽어내는 특징은 거울 뉴런이 왜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복잡한 사회를 만들 수 있었는지 보여준다. 거울 뉴런은 뇌의 전두엽 전운동피질과 두정엽, 그리고 측두엽 뇌섬엽 압쪽에 위치한다. 모두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 고유의 특징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두정엽은 시각, 청각, 체지각을 통합하는 기관으로 이야기만 듣고도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낼 수 있게 한다. 뇌섬엽은 상황을 분석해서 위협을 예측하고 이에 대처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부위로, 타인과 소통할 때 작용한다.
특히 거울 뉴런에 대한 후속 연구에서 사람은 영장류와 달리 무의미하고 목적이 분명치 않은 행동에 대해서도 거울 뉴런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컨대, 단순히 타인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는 그 행동의 의미나 관련성을 전혀 알 수 없다. 옆 사람이 대화하다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을 때, 이 행동이 어깨가 불편해서 하는 행동인지, 아니면 언쟁 중 감정이 격해져서 나온 행동인지 보이는 것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이때 거울뉴런이 말투나 표정과 같은 비언어적인 맥락 정보를 바탕으로 관찰된 행동을 자신에게 대입하여 시뮬레이션함으로써 행동의 의미나 이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협력과 선행의 기원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거울 뉴런이 인간이 고등한 정신 활동을 수행할 때 맥락, 나아가서는 상대의 마음을 읽는 모듈로써 기능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무리를 짓는 동물들에게서 흔히 보이듯 여러 개체가 모여 사회를 이룰수록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러한 충돌이 파국으로 치닫지 않고 발전적으로 해소되어야 누적적 발전이 이어져 문명을 형성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호혜적인 이타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거울 뉴런은 굳이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단지 행동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공동체가 같은 마음 상태를 공유하게 한다. 흔히 하는 말인 ‘이심전심’의 정체가 거울 뉴런인 셈이다. 이를 통해 사람은 상대방과 자신의 관계를 재구성하고, 맥락에 따라 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한편으로 타인에게 공감하면서 건설적인 교류를 이끌어낸다.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중에, 상대방이 무거운 책상 한쪽에서 들어 올리려고 준비하는 것을 봤다고 해보자. 상대방이 탁자를 들어 올리는 행동은 거울 뉴런에 의해 우리 뇌에서 내가 직접 탁자를 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한쪽만 들어서는 책상을 제대로 옮길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한다. 이는 다시 내가 반대쪽에서 균형을 맞춰 책상을 들어 올리는 행동을 촉진한다. 상대방의 행동을 내 행동으로 받아들여서 피드백하는 과정이 계속된 결과 말 한 마디 없이도 상대방과 정교하게 협력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공감 경험이 축적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영장류의 뇌 안에는 일종의 ‘선행기록부’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 듀크 대학의 스티브 창 박사 연구팀에 따르면 이타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이를 누적적으로 기록하는 부위가 있음을 발견했다. 전두엽 피질 중 전대상회(ACG)라는 부위인데, 이 부분은 사회적인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한편, 공감을 형성한다. 우리 뇌는 상대방에게 공감을 느끼고 선행을 베풀수록 이를 계속 기억하고 반복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온 것이다.
거울뉴런에 대한 연구는 인간이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고통에 함께 아픔을 느끼고 도와주려 드는지, 당장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는 조금은 손해보더라도 공공선이라는 가치에 동참하려 하는지 보여준다. 사람을 포함한 영장류는 진화 과정에서 타인에게 돌아가는 보상을 내가 얻는 보상으로 느끼는 능력을 발달시켰다. 덕분에 사회적 활동과 이타적인 행동이 촉진됐으며, 유전자를 공유하는 집단이 한 덩어리로 뭉쳐서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인간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전적으로 가깝지 않은 집단과 다른 종에 대해서도 호혜적인 이익을 주고받는 능력을 발달시켜서 지금의 문명을 형성했다. 따라서 진화적으로 보면 미닝아웃과 같은 가치소비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인 셈이다.

주관적 공감과 보편적인 윤리 사이에서

공감이 분명 더 나은 삶을 만드는 데 기여하기는 하지만 무조건 선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미국 예일대의 폴 블룸 교수는 공감이 지금 시대에 필요한 ‘보편적 선’을 고려하는 데는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공감은 특정 대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타인의 주관적 관점을 나의 주관적 관점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전체를 보지 못하는 일이 생기곤 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진행된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축구팬을 대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보여준 실험에서, 사진의 주인공이 같은 팀 팬이라고 알려줬을 때는 피험자들이 고통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라이벌 팀 팬이라고 알려줬을 때는 ‘고소해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으며 공감지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라이벌팀의 고통을 즐기는 성향이 더 강했다. 이는 공감 능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진화적으로 봤을 때 공감은 같은 유전집단의 안위를 보장하고자 발달해 온 능력이다. 따라서 ‘내 집단’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외부의 집단, 특히 적에 대해서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으로 연결되곤 한다.
결국 공감은 250만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류가 키워 온 소중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표절이나 부정행위에 분노하고 난폭 운전자에게 욕설을 내뱉는 이유는 단지 그 피해자에게 공감하기 때문은 아니다. 이성적인 합의에 따라 그것이 잘못된 행동임을 알기 때문이다. 공감이 도덕성의 탄탄한 기반이기는 하지만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이 더해졌을 때 공감에서 출발한 도덕성이 보편성을 지닐 수 있다. 가치소비 역시 소비자가 공감하는 그 가치가 보편적으로 옳은 가치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보편적이지 않은 도덕성은 집단적인 이기심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