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나침반



 

중국의 고전 ‘한비자(韓非子)’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를 부리다 망신을 당한 한 상인이 등장한다. 초(楚) 나라 장사꾼이 창과 방패를 팔고 있었다. “이 창은 어떤 방패라도 뚫을 수 있다!” “이 방패는 어떤 창이라도 막을 수 있다!” 지나가던 행인이 물었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찌르면 어떻게 되나?” 장사 아치는 말문이 막혀 답을 못했다. 양립할 수 없는 주장 또는 상태를 이르는 ‘모순(矛盾)’이란 고사는 이렇게 생겼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미국과 중국이 첨단 과학기술 전쟁을 벌이면서 모순의 대결이 현실화되고 있다. 바로 어떤 암호든 뚫는 양자(퀀텀) 컴퓨터와 절대 뚫리지 않는 양자 암호통신의 경쟁이다.

양자 기술은 21세기 국가 경제·과학기술 경쟁력의 게임 체인저로 급부상하고 있다. 지구촌 경제 패권의 판도가 확 바뀐다.

21세기 글로벌 게임 체인저가 될 차세대 과학기술·산업 혁명이 물밀듯 현실로 닥쳐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 전쟁(Tech War) 틈바구니에서 갈 길을 잃고 미아로 전락할 처지에 몰리고 있다.

다음 세대에 한국의 경제 주권 확립은 바로 지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미래 국가안보의 핵심인 ‘양자 보안(quantum security)’을 놓고 선진국들이 생존 다툼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올해부터 양자 기술 자생력을 집중적으로 키운다. 


 

정부에 따르면 과학기술정보통신부를 중심으로 올해 460억원을 들여 50큐비트 한국형 양자컴퓨터 개발에 나서는 등 전년 대비 1.8배 늘어난 823억 원의 양자 기술 예산을 투입키로 했다.

양자 연구자도 현재 150명 수준에서 2030년까지 1,000명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는 모든 암호를 해 독하거나 어떤 해킹도 차단하는 ‘양자 보안’ 개발 경쟁 속에서 우리나라만 3~5년 뒤처져 있다는 판단에서다.

미국은 이미 2019년 53큐비트 양자컴퓨터로 슈퍼컴퓨터가 1만 년 걸릴 계산을 단 100초에 해결한 논문을 발표했다. 중국도 지난해 1월 4,600km 거리의 양자 암호통신망을 공개하며 이 분야 세계 1위의 기술력을 과시했다. 유럽연합(EU), 캐나다, 일본 등도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차세대 컴퓨터의 대표주자 양자 컴퓨터를 포함한 양자 기술 선점 전쟁에서 상대적으로 부족한 연구인력과 예산 부족에 목말라하고 있다. 게다가 어정쩡한 ‘전략적 모호성’ 외교 때문에 동맹국인 미국의 지원이나 최대 교역국 인 중국과의 기업 단위 제휴도 불가능한 실정이다.

어느 쪽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어 자체 개발을 서둘고 있지만 이미 벌어진 기술격차는 단기간에 바로잡기 어렵다. 이에 과학계는 차기 정부를 이끌 대권 후보들에게 ‘양자 비전’, 즉 양자 기술 전반에 대한 정책 비전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박제근 서울대 양자과학기술포럼 의장은 "선진국 대비 10분의 1에 불과한 관련 예산을 대폭 확충해 벌어진 기술 격차를 메우면서 양자 암호통신 등 틈새 분야를 선별해 추격전 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자 컴퓨터는 현존하는 최고 성능의 슈퍼컴퓨터보다 이론상 최소 1,000만 배 이상 빠른 미래의 컴퓨터이다. 양자 컴퓨터는 컴퓨터 기술의 ‘게임 체인저’가 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양자 컴퓨터가 이르면 3년 내로 슈퍼컴퓨터의 성능을 능 가하는 ‘양자 우위’에 도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디지털 컴퓨터는 0과 1의 2진법 비트(bit) 회로에 기초하고 있지만, 양자 컴퓨터는 0과 1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큐비트(qubit) 소자를 사용하므로 이론상 거의 무한대까지 연산속도 증가가 가능하다. 미국 IBM사는 이미 선구적인 양자 컴퓨터 시제품을 여러 차례 선보였고, 구글은 2029년 상업용 양자 컴퓨터를 출시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계 교수가 공 동 창업자로 일하는 양자 컴퓨터 벤처 아이온큐(IonQ)는 세계 최초로 지난해 10 월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되기도 했다.

양자 컴퓨터가 주목받는 이유는 지금 존재하는 전 세계의 어떤 암호체계든 무력 화시킬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계산능력 때문이다. 구글이 2019년 논문으로 공개한 큐비트 53개짜리 양자 컴퓨터는 슈퍼컴퓨터로 1만 년 이상 걸리는 연산을 200초만에 해치웠다.

이런 속도라면 현대 암호의 기본으로, 매우 큰 소수(素數)를 소인수 분해하는 공개키 RSA 암호체계가 한 방에 뚫릴 처지에 놓인다. 특히, 대장 코인 비트코인을 필두로 한 암호 화폐도 양자 컴퓨터로 보안이 허물어질 수 있다. 암호 화폐는 분산형 정보처리 시스템 인 블록체인에 공신력의 뿌리를 둔 기술 이다.

참여자 전원이 암호를 공유하기 때문에 단시간 내 과반수의 암호를 변조하지 못하면 해킹하기 불가능하다. 그러나 양자 컴퓨터라면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한마디로 어떤 암호든 뚫는 무적의 창이 바로 양자 컴퓨터인 것이다. 미국은 국가 안보의 미래를 걸고 총력 개발에 나서고 있다. 불안정한 큐비트를 계산 단위로 이용하기 때문에 양자 컴퓨터는 현재 고진공과 절대영도(영하 273도)에 가까운 극저온 상태에서만 작동하는 초전도 형과 이온 덫(ion trap) 형이 주된 시제품 이다. 여러 가지 기술 형태 중 어떤 것이 유력해질지, 얼마나 빨리 대량 생산이 가능할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이에 대해 양자 암호는 절대 뚫기 불가능한 무적의 방패이다. 특히 양자 암호통 신 기술은 중국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을 능가하는 현 장 기술을 잇따라 선보인 바 있다. 지난 2016년 세계 최초의 양자 암호 인공위성 ‘무쯔(墨子)’를 발사해 2,600km의 위성 네트워크를 완성한 데 이어, 베이징(北 京)~상하이(上海) 2,000km 구간에 양자 암호통신 인프라를 깔아 가동 중이다.

게다가 중국은 양자 나침판(센서)과 양자 레이더까지 개발했다. 양자 나침판은 잠수함들이 물 위로 올라와 위성좌표시스 템(GPS)을 켤 필요 없이 심해에서 위치 정보를 알 수 있는 혁신기술이다. 양자 레이더는 양자적으로 얽힌 광자 쌍 중 하나를 쏜 다음 이를 다시 수집해 목표물의 위치·형태·속도·온도 등의 정보를 파악하는 측정기술로, 특히 일반 레이더로 탐지 불가능한 스텔스기까지 포착할 수 있다.

미국은 초비상에 돌입했다. 중국의 도전을 ‘제2의 스푸트니크 쇼크’로 받아들이고 최근 국가과학기술위원회(NSTC)를 개편 해 양자 컴퓨터를 포함한 안보기술에 국력을 집중하는 배경이다. 미국과 중국의 ‘양자 전쟁(QuantumWar)’ 속에 한국은 국가 안보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우리 정보통신(IT) 디지 털 기술은 선진국의 97%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양자정보과학은 81.3%, 양자 컴퓨터는 71.8%밖에 안된다. 정부는 지난해 4월에서야 처음으로 ‘양자기 술 연구개발 투자전략’을 확정하고, 11 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양자기술특별위원회 첫 회의를 열었다. 양자 기술의 경제·산업·안보적 활용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민관 합동위원회다. 과학계는 현 정부를 넘어 차기 정부를 책임질 대권후보들도 국가 경제산업 경쟁력 제고뿐 아니라 미래 국가안보의 핵심 인 ‘양자 안보(quantum security)’ 정책 비전도 뚜렷하게 밝혀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용어해설
양자(量子, quantum) 기술은 원자 단위 이하의 초미세 세계 내 양자 현상과 역학을 활용한 양자 컴퓨터, 양자 암호, 양자 계측(센서 및 이미징) 등의 차세대 과학 분야를 말한다. 특히 양자 컴퓨터와 양자 암호통신의 기초인 양자 정보과학은 양자 현상을 탐구하는 물리학, 양자를 정보의 단위로 활용하는 컴퓨터과학, 양자를 관측·제어하 는 전자공학 등을 아우르는 융복합 과학이다. 양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물리량 또는 상태를 뜻한다. 고전 물리학의 입자 (粒子, particle)와 달리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 관측하기 전에는 상 태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양자는 확률론과 결합한다. 0과 1의 모순된 상태가 관측 전 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이를 양자 중첩(superposition)이라고 한다. 양자 컴퓨터 는 이 현상을 이용해 큐비트(qubit=quantum bit)로 4개의 정보를 한 번에 다룬다. 비트는 한 번에 2개의 정보밖에 다룰 수 없었다. 큐비트 수를 늘리면 기하급수적으 로 연산 능력이 향상하는 원리다. 예컨대, 10개의 큐비트를 제어할 수 있게 되면 이론 적으로 2의 10승(1,024개) 배로 정보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양자 암호통신에서 는 양자 얽힘(entanglement) 현상이 응용된다. 한 쌍의 얽힌 양자는 공간적으로 멀 리 떨어져 있어도 얽힌 상태를 유지하는데, 이 중 하나를 관측해 상태가 정해지면 다 른 하나의 상태도 동시에 확정된다. 해킹을 하려 한 곳의 양자를 손대면 다른 곳의 양 자도 변하기 때문에 즉시 알아차릴 수 있다. 즉, 원칙적으로 중간에서 가로챌 수 없는 암호통신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