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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인사이트에서는 혁신의 트렌드, 전략 및 혁신사례를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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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진서 기자 동아일보


혁신 경영의 대명사인 애플이 신제품을 내놓았다. 홈팟(HomePod)이라는 인공지능 스피커다.

애플 CEO 팀 쿡이 6월 초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WWCD(애플 개발자 대회)에서 직접 이 제품을 소개했다.

홈팟은 애플의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시리’를 탁상용 스피커 안에다 담아놓은 형태다.

이미 아마존과 구글은 이런 ‘스마트 스피커’ 제품을 팔고 있다. 애플 홈팟은 차별화 포인트로 ‘음악’을 강조하고 있다.

경쟁 제품들보다 음질도 뛰어나고, 애플이 가진 4,000만 곡의 음악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할 수 있으며, 홈팟이 놓여 있는 공간의 형태에 맞게 소리의 크기와 방향을 자동 조절하는 공간지각 기능을 갖췄다고 소개했다.

과연 홈팟은 애플의 명성에 어울리는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이날 발표장의 분위기만 보면 그다지 희망적이진 않다.

대형 스크린에 홈팟이라는 이름이 찍혔을 때 관중들은 미적지근한 박수를 1초 정도 보내줬다.

과거 스티브 잡스가 아이팟이나 아이폰(iPhone)을 발표했을 때 받았던 환호와는 차이가 크다.

미국의 IT 매체 ‘더 버지(The Verge)’는 홈팟을 두고 “팔방미인이지만 그 어느 방면에서도 최고는 아니다(Home Pod looks like a jack-of-all-trades, but master of none)”라는 평가를 내렸다.

필자가 홈팟을 보자마자 떠올린 제품이 있다.

지난 2014년 SK텔레콤이 출시했던 셋톱박스 ‘비박스(B box)’다.

비박스는 홈팟처럼 인공지능 기능이나 자체 스피커를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흰색 박스 형태로 ‘스마트 홈엔터테인먼트 허브’ 역할을 하겠다는 기획의도는 비슷한 제품이었다.

디자인적인 완성도도 높았고, 당시 SK텔레콤의 기술혁신 역량을 총동원해 만든 제품이기도 했다.

하지만 상업적으로는 별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1~2년 만에 슬그머니 사라졌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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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허브’ 시장을 노린 혁신 시도

2014년 1월 출시된 SK텔레콤 비박스는 케이블TV 셋톱박스 기능에 홈 모니터링 기능, 인터넷 기능 등을 추가해 가정의 통신/엔터테인먼트 허브 역할을 하도록 기획된 상품이었다.

외관은 매끈한 백자 도자기 느낌이 나는 고급 플라스틱을 썼고, 은은한 무드 조명 기능도 갖췄다.

TV 장식장에 처박아두는 셋톱박스가 아니라 꺼내 놓고 싶은 인테리어 소품을 목표로 했다.

기획부터 출시까지 2년 가까이 걸린 회심의 제품이었다.

당시 SK텔레콤은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 휴대폰 시장과 유선 인터넷 시장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차세대 성장을 위한 상품을 기획하다 보니 다음 격전지는 ‘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에 따라 회사가 가진 유무선 인프라를 총동원했다.

당시 삼성전자 등 소비자 가전기기를 만드는 회사들은 냉장고나 TV 등에 인터넷을 연결해 홈 허브로 사용하려 한데 비해, SK텔레콤은 자회사인 SK브로드밴드에서 케이블TV 사업을 하고 있었으므로 케이블 셋톱박스를 홈 허브의 주인공으로 삼기로 한 것이었다.

일단 소비자의 가정에 비박스를 들여놓는 데 성공하면, 그다음부터는 자사가 보유한 유무선 통신망과 무수한 소프트웨어 서비스들을 이용해 다양한 수익모델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아마 애플이 홈팟에 걸고 있는 기대도 비슷할 것이다).

SK텔레콤의 비박스 프로젝트팀은 여러 측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시도했다.

기존의 케이블TV 셋톱박스들은 대부분 검은색이었지만 비박스는 밝은 흰색을 택했으며, 아예 TV 장식장 안에 들어가지 않도록 커다란 정육면체 박스 형태로 디자인했다.

모서리는 둥글게 처리하고 케이스 안쪽에 발광체를 넣어 은은한 불빛이 나오는 무드등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기능 측면에서도 혁신적인 요소들을 넣었다.

TV 위에 설치하는 화상카메라와 연결해 집안 상황을 스마트폰으로 모니터링할 수 있게 하고, HD급 영상통화 기능도 넣었다.

또 TV 화면에 최적화된 인터넷 브라우저도 제작했다.

이런 추가적인 HW/SW 설계 요소 때문에 비박스는 일반형 셋톱박스보다 제작 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셋톱박스는 케이블TV가입자가 1년 이상 약정 계약을 맺고 임대하는 형식으로 판매되는데, 비박스의 경우 3년 약정 기준으로 임대료가 월 2,000원 정도 높았다.

프로젝트 담당자들은 비박스가 충분히 월 2,000원 이상의 심미적, 기능적 가치를 소비자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2014년 1월 출시 이후, 비박스는 우선 디자인 업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 중 2개(iF Product Design Award 2014, IDEA Design Award Entertainment 부문)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거기까지였다.

출시 1년도 되기 전에 하드웨어 제작 단가 문제와 기기 발열 문제 때문에 기능과 외관을 다운그레이드 해야 했다.

비박스의 상징이었던 무드등 기능을 빼고 전통적인 셋톱박스 같은 납작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시 1년도 지나지 않아 ‘비박스’라는 브랜드 자체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온갖 혁신 기능을 망라해 기획된 프리미엄 ‘스마트 셋톱박스’ 비박스는 왜 시장에서 성공하지 못했을까?

국민대학교 경영학과 주재우 교수와 필자는 당시 이 사례를 함께 살펴보며 크게 세 가지 이유를 찾았다.

첫째, 셋톱박스를 예쁘게 만들면 소비자들이 이를 TV 장식장 위로 꺼내놓을 것이라는 가정은 현실에선 잘 먹히지 않았다.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은 전자기기와 다르다.

개인의 심미적 취향을 많이 탄다.

사람들은 아무리 예쁜 인테리어 소품이라 해도 내 개인의 취향과 맞지 않거나 우리 집의 분위기와 맞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

비박스는 이런 점을 간과한 것이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셋톱박스에서 TV 시청 이상의 기능을 기대하지 않는다.

비박스는 영상통화, 전용 인터넷 브라우저 등 소비자들이 아직 긴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기능을 추가하면서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

사용하기 까다로운 혁신 제품인데 가격까지 비싸니 일부 얼리어답터 성향의 소비자를 제외한 일반 대중으로부터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셋째, 가장 큰 문제는 조직 내부의 이해관계였다.

비박스는 SK텔레콤에서 기획하고 제작했지만 실제 영업은 자회사인 SK브로드밴드에서 이뤄졌다.

그러다 보니 AS나 기술 업데이트의 속도와 일관성이 떨어졌다.

또 SK브로드밴드는 초고화질 영상을 볼 수 있게 하는 UHD 셋톱박스를 자체적으로 개발해 판매하고 있었던 것도 비박스에겐 불운으로 작용했다.

UHD 고화질 비디오 콘텐츠는 저화질 콘텐츠보다 편당 다운로드/시청 가격을 높게 책정할 수 있다.

IP TV나 케이블 TV 업체에게 UHD는 저비용 고매출의 캐시카우 비즈니스다.

한 가정이 두 개의 셋톱박스를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회사 입장에서 UHD 셋톱박스와 비박스 양쪽에 마케팅 자원을 모두 쏟아부을 이유가 없는 데다가 비박스의 디자인적인 차별성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UHD 셋톱박스 쪽에 전사적 지원이 집중됐다.


홈팟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비박스의 사례는 애플 홈팟에겐 타산지석의 교훈이 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엔 홈팟 역시 조직 내외부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비박스와 같은 이유에서다. 우선 높은 가격이 소비자들에겐 걸림돌이다.

홈팟 역시 프리미엄 제품으로 포지셔닝 하다 보니 아마존 ‘에코’나 구글 ‘홈’에 비해 가격이 높게 설정됐다.

애플은 홈팟이 대당 349달러에 판매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아마존 에코는 140달러, 보급형인 에코 닷은 40달러에 불과하다.

만일 소비자가 뛰어난 성능의 스피커를 원한다면 굳이 홈팟을 살 게 아니라 그냥 스피커 전문회사가 만드는 좋은 스피커 한 세트를 사는 게 가성비 측면에선 현명한 선택이다.

또 홈팟이 애플의 명성에 맞게 디자인이 경쟁사 제품들보다 더 예쁘다고는 하지만 이 역시 소비자에겐 그다지 큰 매력으로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비박스의 사례에서 보듯 거실이나 방안에 들여놓는 인테리어 소품은 개인의 취향을 탄다.

방안의 분위기와도 어울려야 한다. 차라리 ‘에코 닷’처럼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형태가 소비자에겐 더 큰 효용을 줄 수 있다.

애플 내부의 이해관계 역시 중요하다.

애플이 과연 홈팟의 마케팅과 영업에 아마존 에코만큼의 자원을 투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존의 경우, ‘에코’는 그 자체로서 매출을 올리는 역할보다는 에코를 구입한 회원들이 음악을 듣기 위해 자연스럽게 ‘아마존 프라임’ 멤버십에 가입하도록 유도하는 미끼상품 역할을 한다.

아마존 프라임 멤버가 되면 아마존에서 쇼핑을 하거나 다른 서비스를 구매할 확률이 치솟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마존은 전사 차원에서 에코에 많은 마케팅 자원을 투자할 수 있다.

반면 홈팟을 구매한다고 해서 다른 애플 제품이나 서비스의 구매로 이어질 가능성도 적고, 오히려 아이폰이나 맥북과 같은 자사의 기존 제품과 소비자의 지갑을 두고 경쟁하는 모습이 연출될 수도 있다.

우리는 멋진 혁신 제품이 항상 시장에서의 성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의 제품이 소비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제품 그 자체의 기능과 디자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과연 이 제품이 소비자가 진정 원하는 가치를 전달해 주고 있는지, 또 회사 내부 조직원들의 신뢰와 지원을 받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물론 애플 홈팟의 출시 자체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매출이나 수익과 별개로 회사가 거둘 수 있는 성과들이 있기 때문이다.

SK텔레콤은 비박스를 출시하면서 회사 역사상 최초로 소비자용 HW와 SW를 아우르는 개발 경험을 했고, 이런 조직학습 효과는 이후 다른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에 유용하게 전수됐다.

또 새로운 제품을 기꺼이 수용하는 얼리어답터, 고급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확보한 것도 수확이었다.

애플 홈팟 역시 이런 간접적 가치를 창출해낼 수 있다.

여태껏 애플이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홈 엔터테인먼트’ 시장으로의 첫 진출이라는 의미, 그리고 인공지능 시리를 통해 방대한 소비자 행동 패턴 데이터를 입수할 수 있다는 의미는 가볍게 보기 어렵다.

애플이 만만한 회사가 아닌 만큼 홈팟 역시 단기 수익만을 기대하고 출시한 제품은 아닐 것이다.


< 참고문헌 >

주재우, 조진서, ‘“예쁘긴 한데 비싸고 복잡하대요” 스마트 홈을 향한 시행착오… 교훈은?’ SK브로드밴드 프리미엄 셋톱박스 B box 출시 2년 후, 동아비즈니스리뷰 2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