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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아카데미 - 철학에서 본 변화와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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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형철 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예상할 수 없는 것을 예상하라!

어떤 지역에 쓰나미가 한 번 왔더니, 5천 명이 죽었다. 엄청난 인명손실과 재산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사실 쓰나미만큼 무서운 재난도 없다.

특히 저지대에 평평한 지형에서는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당국이 조치 하나를 취한다.

인공방파제를 설치한 것이다.

그 후 다시 쓰나미가 또 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을까? 무려 50만 명이 죽는다.

조사결과 인공방파제가 부실공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렇게 엄청난 사람이 죽었을까?

인공방파제가 설치되어서 이제 과거보다 안전하다고 정부가 홍보하자 더 많은 사람이 더 해안 가까이 몰려 와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게 누구의 잘못일까? 주민들? 아니면 정부?

잘못은 일차적으로 정부에 있다. 자신들이 예상할 수 없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정부관계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한다. 변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을 뿐이다.”

2,500년 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이 말은 영원한 진리이다.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한 번 흘러간 강물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한 번 지나간 인생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날 제자 두 명이 자신들의 스승을 찾아와 물었다.
 
“인생은 어떻게 사는 것입니까?”

스승은 바로 답변해주지 않고, 대신 제자들을 데리고 과수원으로 간다.

“이 과수원에는 맛있는 사과가 여러 개 있다. 너희가 제일 좋아하는 사과 하나씩을 딸 수 있도록 해주겠다. 단 조건이 하나 있는데, 절대로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스승은 말을 마치고 후문에서 제자들을 기다린다. 과수원 안으로 들어간 제자 둘이 조금 지나자 사과를 들고 온다.

“너는 어떤 사과를 땄느냐?”

“예,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아주 맛있는 사과를 발견했습니다. 그걸 바로 따려고 하다가 좀 더 가면 더 좋은 사과가 있을 것 같아 그냥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사과나무가 다가오도록 처음 본 것만큼 맛있어 보이는 사과가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황급하게 이 사과를 땄습니다. 딱 한 번만 되돌아가 가게 해주십시오.”

이번엔 다른 제자에게도 묻는다.

“너는 어떤 사과를 땄느냐?”

“저도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아주 맛있는 사과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사과를 땄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이것보다 맛있어 보이는 사과를 여럿 보게 됐습니다. 이미 사과를 따버렸는데 말이지요. 딱 한 번만 되돌아가게 해주십시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스승은 이야기한다.

“그게 바로 인생이다. 되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수 없는 것이다.”


궁즉통을 아는가?

궁즉통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는가? “궁하면 통한다. 즉 어려워지면 해결책이 나온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렵기만 하면 저절로 해결책이 나오는 것일까? 원래 이 말에는 가운데에 생략된 부분이 있다.

“궁즉(0) (0)즉통”이라는 말인데 그 가운데 (0)으로 처리한 글자가 같은 거다. 괄호 처리된 글자는 무엇일까? 바로 변화할 때 쓰는 변이다.

어려워지면 변하고, 변하면 해결책이 나온다는 것이다. “변화의 책”(영어로 하면 The Book of Change)인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그러면 해결책이 나온 다음에는 어떻게 되는가? 해결책을 찾으면 오래 간다. 이게 바로 통즉구다.

그래서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변화의 세계관을 주역은 우리에게 제시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가다보면 다시 궁하게 된다. 구즉궁이다.

이렇게 세상은 순환고리에 갇히면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면서 변화한다.

아무런 패턴도 없이 좌충우돌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패턴에 따라서 변화한다.

이 패턴을 이해하면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방도를 찾을 수 있다.


스스로 혁신하라 그렇지 않으면 외부에 의해서 혁신당한다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한 마리 있었다. 그 크기가 몇 천 리가 될 정도로 엄청 큰 물고기다.

그런데 이놈이 가만히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집을 점점 더 불리더니, 갑자기 ‘붕(鵬)’이라는 새로 변한다.

붕은 한 번 날았다하면 9만 리를 날아간다. 그리고는 한 번을 쉰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참새가 뱁새에게 말한다.

“야 저 붕이라는 새는 참 이상한 놈이다. 왜 9만 리씩이나 한 번에 날아가지? 너하고 나하고는 저 옆 나무 가지에 날아가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2,500년 전 중국의 철학자 장자가 소요유(逍遙遊)편에서 말하는 우화다. 왜 곤이라는 물고기는 붕이라는 새로 변했을까?

이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져 보면, 여러 가지 답이 나온다.

‘이전에 할 수 없었던 것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등등.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대로 계속 될 수는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곤이 물속에서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으며 몸집만 계속 불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먹잇감인 작은 물고기들이 언젠가 다 죽고 나면, 결국엔 곤마저도 굶어 죽을 것이 너무나도 뻔하지 않는가?


게임의 법칙을 바꿔라

토끼와 거북이 이솝우화를 기억하는가? 어쩌다 둘이서 달리기 시합을 하게 되었는가?

원전에 보면 토끼가 거북이를 심하게 놀린다. 그래서 열 받은 거북이가 감히 토끼에게 달리기 도전장을 날린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 판 지고 난 토끼가 열 받았다.

“야 거북아! 한 판 더 붙자!”

자 여러분이 거북이라면 토끼의 리턴 매치를 받아들이겠는가? 이번에도 토끼가 또 잘 것 같은가?

앞에서 이빨 갈면서 말하고 있는 데도 자신은 도전해서 이기고 상대방이 재도전하면 꼬리를 낮춘다?

이 세상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 도전할 때 이미 재도전이 들어올 것이라는 것쯤은 각오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야 토끼야 수영 한 판할까?”라고 응수하면 어떨까?

이번에도 또 수영만을 할 필요는 없다. 남의 방식으로 원정경기 가서 이기는 것, 이거 대단히 값진 승리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언제 누가 도전해 오더라도 항상 이길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만의 홈그라운드를 가지고 있는 거다.

그러려면 내가 현재 잘하고 있는 것에 집중하라! “내가 잘하는 것을 어디까지 잘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내 몸값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변화는 정반합의 법칙을 따른다

핵미사일이 한반도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로켓의 끝에 달린 것이 위성인가 아니면 핵폭탄이냐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크게 달라진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 해야 할 사실 중의 하나는 로켓의 작동방식이 반작용에 기인한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 뒤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중요한 일들은 반작용에 의해서 결정되어 왔다. 일단 한 가지 입장이 정해지고 나면, 그것에 반대하는 입장이 나타난다.

정과 반 사이에 팽팽한 긴장의 관계가 지속된다. 그러다 보면 양자의 입장을 초월하는 합이 나온다.

내 자신의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라! 그 사람의 에너지를 내가 써야지만 앞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장에 반대하는 말은 입에 쓰기 마련이다. 그래서 쓴소리를 즐겨라! 예스맨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직의 방향에 태클을 거는 사람을 내치지 마라! 오히려 귀 기울여라! 왜 그렇게 모두에게 불편한 발언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현재의 조직을 혁신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될까? 그 조직에 한 번도 몸담지 않은 사람을 영입해서 전권을 줘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도와줘라!


벌거숭이 임금을 반면교사하라!

안데르센 동화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벌거숭이 임금이다.

임금님은 어쩌다 세상 사람이 다 보는 앞에서 벌거벗고 나돌아 다니게 됐을까?

원래 패션에 관심이 굉장히 많은 왕이었다.

1시간 단위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정작 본인은 자국의 패션업계의 발달에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좀 엉뚱한 왕이다.

이웃나라 사기꾼들이 이 사실을 놓칠 리가 없다.

“폐하! 특수 천으로 옷을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한 달만 주세요!”

결국 그 프로젝트는 승인된다. 왕이 그 옷에 마음을 이미 뺏겼다는 사실을 간파한 신하들도 다 찬성이다.

반대가 실종된 상태에서 만장일치로 진행된 그 프로젝트의 결과가 바로 발가벗고 길에 나선 거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시장에 내놓기 전에 사내에서 계급장 떼고 치열하게 토론을 했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그런데, 어린아이가 “임금님은 발가벗었다” 외치는 바람에 산통이 다 깨지게 된 것이다. 자, 이제부터 진짜 문제다.
 
그 왕은 자신이 이제 발가벗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어떻게 했을까?

그 자리에서 행진을 취소하고 왕궁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벌거벗은 채로 예정된 코스를 끝까지 걸어갔다는 거다. 이것은 국민에 대하여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자신의 정책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는 순간 멈추는 것이 국민의 고통을 완화시키는 길이다.


혁신이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혁신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면 구제도는 폐지된다.
 
구제도가 폐지됨과 동시에 불이익과 불편함은 즉각적으로 발생한다.

아무리 나쁜 제도라도 그에 따른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은 불편하고 불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새로운 제도가 도입됨에 따라 나타나게 될 혜택을 즉각 발생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는 동안에 이런 불평들이 나온다.

“참 좋은 제도인데, 아직은 시기상조인 것 같아! 우리 조직문화와는 좀 안 맞는 것 같아! 이다음에 적절한 타이밍에 하는 것이 더 좋겠어!”

리더가 여기서 멈추고 되돌아서면 그 조직은 다시는 그 혁신을 할 수 없게 된다.

새로 조직에 들어 온 직원이 어떤 혁신 제안을 한다.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요?”

“아 그거! 그거 안 돼! 이전에 해 봤었는데 우리하고 안 맞아! 아 참 자네가 이 회사 들어오기 전 얘기구먼.”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혁신의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사전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한 번 혁신을 하기로 결심한 리더는 사전에 자신의 비전을 이해할 수 있는 혁신전도사들을 양성해야 한다.

그들이 계속 그 비전의 정당성을 전파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켜야한다.

현업에 파묻혀 다른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데이터를 가져와 보라

옛날 옛적에 한 꼼꼼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자신이 새 신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미리 자신의 발을 정확하게 측정한 다음에 그 줄자를 잘 보관해둔다.

다음에 장터에 갈 일이 있을 때 들고 가려고 말이다. 장날이 다가 왔다.

갔더니 신발장수가 여러 가지 신발을 좌판위에 펼쳐 놓고 팔고 있다. 이리저리 물건을 고르다 마음에 딱 드는 신발이 나온다.

그 신발을 사려고 하는 데, 아뿔싸 그 줄자를 집에 놔두고 온 것이다.

“보시오! 내가 집에 가서 줄자를 가져와야 하니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있소?”

“아니 손님! 이 신발이 맞는지 아닌지는 지금 바로 신어보면 될 거 아니오! 거 참 별난 사람 다 보겠네!”

“아니 내가 정말로 정확하게 측정한 줄자란 말이오! 잠깐만 기다려주시오. 내 곧 갔다 오리다.”

결국 그 신발은 다른 사람에게 팔려 버렸다. 자 여러분은 이 사람이 한심해 보이는가?

과연 이런 바보가 세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가? 우리 주변에 의외로 이런 바보는 널려 있다.

“부장님, 이번 일은 이렇게 새로운 방식으로 해보는건 어떨까요?”

“야 그거 데이터 있어?”

허걱 데이터라니! 혁신적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원래 데이터가 없는 법이다.

늘 하던 대로 하는 경우에나 데이터가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을 새롭게 해보려고 할 때마다 “데이터 데이터” 하는 사람은 혁신 기회를 절대로 잡지 못한다.

일이 터지기만 하면 “전임자가 어떻게 했는가”라는 생각만 하는 사람은 집에 놔두고 온 줄자를 찾으러 가는 바보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


전격전을 개시하라!

전격전이 왜 독일어인 “블리츠 크리크”로 불리는 줄 아는가? 전격전을 현대전에서 제대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히틀러기 때문이다.

탱크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기존의 시니어 장군들은 다 반대다.

보병장군들은 탱크가 전쟁수행능력도 제대로 없으면서 엄청난 굉음만 일으켜 보병들의 전투력 저하를 가져온다고 반대다.

그도 그럴 것이 시속 6㎞에 불과했으니까. 포병장군들도 더 큰 화력으로 더 정밀타격을 가할 수 있는 장거리 포가 있으니 탱크는 필요 없다는 거다.

내심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도 좋을 리가 없다. 그래서 탱크 도입을 주장하는 주니어 장군들을 틈만 나면 시골로 좌천시키려고 한다. 이걸 히틀러가 막아준 거다.

주니어들에게 혁신의 기회를 준 거다. 블리츠 크리크의 핵심은 “적의 주력부대랑 맞장 뜨지 마라!”이다.
 
마지노선을 지키고 있는 프랑스군과 정면충돌하면 속도가 날 수가 없다.

뒤로 싹 돌아가는 거다. 전투에서 이것보다 더 허무한 게 어디 있을까?

전방을 잔뜩 주시하고 “오기만 해봐라! 뜨거운 맛을 보여 주마”라고 벼르고 있는 데 안 나타난다. 지나갔단다. 어이가 없다.

전쟁에서 혁신은 신무기 개발에서도 나오지만 더 큰 것은 전략의 혁신이다.

조직 내에 혁신별동부대를 유지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기회가 올 때까지 보호해 줘라!


변화와 혁신 그리고 철학

사실 철학자들에게 혁신은 그렇게 낯선 개념이 아니다. 2,500년 전 철학이 시작한 이래로 철학자들은 줄곧 앞선 선배 철학자들의 권위에 눌리지 않았다.

늘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쳐다보는 방식을 연구해왔다. 항상 철학자들의 연구는 제로베이스에서 출발한다.

질문도 정답이 없는 질문만을 던진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삶의 가장 근본을 건드리는 것이다. 이는 마치 리더가 조직 내에서 이렇게 질문하는 것과 같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우리 회사는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리더만이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왕이 되는 것이다.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가 인간의 영역을 하나둘 먹어 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소크라테스의 지혜만큼은 인간이 찾아야 한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혁신을 추구하는 리더는 비전을 가져야 한다.

가야할 방향이 없으면 혁신도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