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 - LG화학기술연구원 유진녕 사장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그리고 향후계획 등을 알아봅니다.
공동작성_
이동기 대표(SBP전략경영연구소)
이정선 전문작가(프리랜서)
이종민 과장(산기협)
야누스의 눈으로
희망의 미래를 이끈다
야누스(Janus)! 이 단어를 들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야누스의 두 얼굴’을 떠올린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신들 중 한명인 야누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거를, 다른 하나는 미래를 지향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기업의 경영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앞과 뒤를 다 볼 수 있는 이 야누스의 눈이 아닐까.
과거와 미래를 같이 보는 야누스의 눈처럼 사물의 앞과 뒤, 겉과 속, 현상과 본질을 두루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춘 시각이 절실하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볼 때 기업 R&D조직의 중요성과 역할이 날로 커지고 있다. R&D를 통한 원천기술의 확보가 기업의 생존과 번영에 있어 필수 전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민간기업 연구소로 자리잡은 LG화학기술연구원 유진녕 사장(원장)의 연구개발 활동과 성과를 들어보자.
운명을 바꾼 선택
LG화학기술연구원의 유진녕 사장은 1981년 입사 이후 30년 넘게 연구개발(R&D)을 이끌어온 주인공이다.
신소재연구소장, CRD(Corporate R&D)연구소장 등을 역임하고, 2005년부터 기술연구원장으로 LG화학의 R&D를 총괄하고 있는 그는 특히 정보전자소재 분야의 핵심기술 및 제품개발을 주도하여 LG화학이 세계적인 소재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유사장은 세계적인 소재기술을 바탕으로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분야에서의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또한, 최고수준의 메탈로센 촉매기술 개발로 석유화학 분야에서의 새로운 성장사업 창출 및 세계최초 3D TV 핵심소재 FPR(편광패턴필름) 개발 등을 통해 R&D기반의 사업성과를 주도하고 있다.
한편, 유 사장은 발명의 날 ‘금탑 산업훈장’ 수훈 및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기술경영인상’(CTO부문)을 수상하며 대외적인 인정을 받았다.
대전 유성구 문지동 대덕연구개발특구내 LG화학기술연구원에서 이뤄진 유진녕 사장과의 만남. 서울대학교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KAIST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그가 LG화학과 인연을 맺은 계기가 궁금했다.
“1981년 KAIST 졸업을 앞두고 두개 회사에서 취업의뢰가 들어왔어요. 한 곳은 서울에 있는 곳이고 다른 한 곳은 대전에 있는 LG화학기술연구원(당시 럭키중앙연구소)이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누구나 서울근무를 선호했었죠. 하지만 취업의뢰를 받은 저와 다른 동기 둘 중에 한 명은 서울이 아닌 대전지역 근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곧 결혼을 앞둔 동기에게 기꺼이 서울에 있는 회사 입사를 양보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동기가 어찌나 고마워하던지요. 먼저 양보해달라 말은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많이 했던가 봐요.”
그렇게 시작된 LG화학과의 인연은 어쩌면 운명같은 것이었는데, 물론 LG화학이라는 회사의 발전가능성을 믿었고 거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는 굳은 믿음도 있었기에 그때의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39세, 연구소장이 되다
입사 이후 그에게 처음 부여된 과제는 난연 ABS(Acrylonitrile Butadiene Styrene Copolymer; 산업용 플라스틱 소재로 불에 잘 타지않는 기능을 강화한 제품)였고, 이어 EP(Engineering Plastic) 등 석유화학제품 개발에 참여하며 연구개발에서의 성공을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전남 여수공단내에 있는 공장을 찾아 개발한 기술을 적용하는 테스트를 진행해야 하는데, 당시 공장여건은 그에 부합하지 못했다. 제품 생산과 출시를 위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 주간에는 설비의 가동을 멈출 수가 없는 상황에서 주간근무자들이 모두 퇴근한 후에야 테스트를 진행해야 하는 어려움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오전 9시 이전에 실험을 모두 마쳐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아예 밤에 도착하는 기차를 이용하는 경우도 자주 있 었어요.”
그러면서 그때 연구에 도움을 준 연구보조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그들의 역할에 대해 강조한다.
“연구원들은 공장의 상황을 잘 모르니, 생산현장에 있는 연구보조원과 기능직 사원들의 도움없이는 실험 자체가 불가능하였습니다.”
사실 같은 회사 근무자라 해도 서로 다른 부서에 있다 보면 자신의 일을 지연시키거나 업무외적인 시간을 요구받게 되면 누구나 거부의 의사를 보이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철야작업같은 협조를 받으려면 진심어린 부탁과 인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게 연구소와 공장을 오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는 중요한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고 한다.
“오늘날은 기술의 융·복합화와 더불어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제품에 대한 기술의 범위가 너무 깊고 넓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기술이나 지식을 동원하고 그들과의 협력을 통해야만 앞으로의 기술환경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물론 퇴사를 고려할 만큼 힘든 시기도 있었다. 재직 중 해외 학위 파견과정(박사)을 거쳐 다시 연구소로 돌아온 그는 곧바로 프린터 토너용 수지 개발에 착수했다. 물론 연구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사업화 결정만을 목전에 남겨두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사업성과 시장성 등의 이유로 토너 수지사업을 하지 않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갑작스런 사업화 포기 선언은 그를 포함한 연구원 모두의 차년도 연구과제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의 사태는 결국 그동안 사업부의 전략과 의도를 세밀하게 확인하지 못한 나의 실수라는 생각에 내가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결국 회사를 떠나야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반면 당시 기술연구원장(여종기 원장)의 생각은 달랐다. 일련의 과정에서 그의 대응모습을 지켜본 결과 일반 연구자보다는 기술력과 조직관리, 리더십 등을 겸비한 관리자로 육성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고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39세의 젊은 그를 연구소장으로 발탁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미래성장의 기회를 찾기 위한 도전과 성과
LG화학은 석유화학, 산업 및 건축자재, 생활건강용품 그리고 의약·바이오 제품 분야 등의 사업영역을 가지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기존 사업 이외에 새로운 성장동력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정보전자소재 분야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검토하게 되었다. 미래성장의 기회를 찾기 위한 새로운 사업발굴 추진계획을 구체화하는 활동의 진두지휘를 유 사장이 맡게 되었다.
유 사장은 세부기회(Opportunity) 발굴을 위하여 태스크포스팀 활동을 통해 IT 소재 및 2차전지 등의 사업모델과 추진 로드맵을 구체화한 소위 ‘정보전자소재 마스터 플랜’(Master Plan) 구축에 주도적 역할을 해냈다. 이로써 LG화학은 장기적 관점에서 성장을 위한 다양한 사업군을 도출하고 사업의 포트폴리오를 더욱 확대할 수 있는 토대를 다지게 되었다.
다양한 신사업을 전개할 수 있는 모태가 되었고, 새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한 전략적 방향 결정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간의 성과에 대해 유진녕 사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연구자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도출해낸다 해도 최고경영자가 지원(Top management의 Commitment)해 주지 못한다면 신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 당시 우리의 활동을 인정해주고 힘을 실어준 CEO의 결단 덕에 공격적인 전략을 펼칠 수 있었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유 사장은 이후 신사업 발굴과 기획 그리고 연구개발활동을 통하여 자신만의 굳건한 경영철학을 구축하게 되었다. 소위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양손형(Ambidextrous) R&D전략의 추구’가 그것이다.
이 개념은 최근 하버드 비즈니스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의 논문인 ‘양손잡이 조직’(The Ambidextrous Organization)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경영과 사업전략 회의 등에서 그는 항상 이렇게 주장한다고 한다.
“단기적 성과에 집중하게 되면 그 기업의 미래를 보장받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기업은 1~2년 또는 3~4년 경영하다 없어지는 것을 전제로 사업과 경영활동을 하지는 않죠.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후 또는 더 먼 미래에도 지속적으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여 세계최고의 기업위치 확보를 기대하면서 경영활동을 추진해야 합니다.”
한 조직의 장은 단기적 성과를 통해 평가받는 게 일반적이지만 진정한 경영자라면 미래를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는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형의 기술전략을 추구하는 국가였어요. 특히 전기·전자, 자동차, 철강, 반도체 등의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일본의 기술을 따라 잡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추진했던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이미 많은 분야에서 중국의 추격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연구개발활동 전략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효율중심의 연구문화에서 탈피해서 세계최고, 세계최초의 원천기술 개발에 집중하는 ‘창의적 시장선도자’(First Mover)로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요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은 아직도 새로운 변화에 대한 물결에는 독(毒)이 되는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저는 그것을 타파하기 위한 조직문화 구축에 집중해 왔습니다.”
창의적 시장선도자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과거와는 다른 문화적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나를 따르라는 식의 효율 중시의 문화로는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들어낼 수도, 시장을 선도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자율과 창의의 문화 그리고 집단지성을 활용한 협업과 혁신의 문화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술경영 체계 구축활동과 철학
연구자이자 기술연구원장으로서 35년 외길을 걸어온 유 사장은 그동안 수많은 성공과 좌절을 겪어왔다. 이러한 경험들이 바탕이 되어 현재 LG화학기술원에서는 다양한 혁신활동 시스템들이 운영되고 있다.
먼저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현재 운영하고 있는 프로젝트 관리체계, 즉 게이트리뷰 체계(Gate Review System)를 근원적으로 혁신해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R&D 프로젝트는 일정계획을 비교적 정확히 계산해낼 수 있는 건축이나 토목 공사와는 다릅니다. 특히 소재개발의 경우 정해놓은 마일스톤(Milestone)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무조건 과제를 중단시키면 남아나는 과제들이 많지 않습니다. 물론 마일스톤(Milestone)을 지키기 위한 활동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의 것을 더 고려해 봐야죠.”
이에 대하여 유진녕 사장은 두가지 중요한 의사결정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과제가 지연된다 해도 시장이 그대로 살아있고, 경쟁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가 하는 점 그리고 연구자가 평소 연구에 열정적으로 임했는가를 체크하는 것이다.
“연구는 지속적인 활동의 연속이므로 하나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전부로 판단하면 안됩니다. 연구과정에서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히 임했는가가 중요한데, 그것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평소 연구자와의 지속적인 소통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과제에 대한 평가 역시 이러한 일상적 관심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흔히 보통의 사람들이 활용하는 기준인, 시장잠재력, 개발 접근방법, 개발 리스크 등이 중요한 척도이지만, 평소의 활동을 유심히 관찰해 그 사람의 숨은 ‘열정’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과는 결과와 과정을 모두 고려한 것이어야 합니다. 결과만을 챙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결과보다는 그 과정을 면밀히 체크해서 평가를 할 수 있어야 진정한 관리자라 할 수 있습니다.”
두번째는 개발속도(Time to Market)를 빠르게 하기 위해 연구원들의 집단지성을 활용하는 내부 개방형 혁신(Internal Open
Innovation)을 활성화하고 있다.
조직이 방대하면서 세부기능이 잘 분리되어 있으며 내부 연구팀이 많으면 자신이 계획한 연구내용이나 추진단계에 대해 도움이 되거나 과거 그와 관련된 어떤 연구활동이 있어왔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쉽지 않다. 자칫 이러한 일이 반복될 경우 기업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발행되고 자원의 낭비가 심화될 것이 뻔하다.
따라서 유사장은 연구개발활동 과정 중에 어떤 작은 문제나 난관에 봉착할 경우 기술연구원 인트라넷인 ‘ASK 시스템’에 문의해 관련자의 도움을 받거나 자유로운 토론으로 이끌고 있다.
또한 기술적 이슈를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해결할 수 있도록 여러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자리잡기까지 유 사장 자신은 물론 연구소 경영진들이 먼저 솔선수범한 점도 눈에 띈다
“애로사항에 관한 연구원의 질문이 사내 게시판에 올라오면 과거 업무를 담당했던 전문가의 연락처를 전달하고, 해당 전문가에게는 사전에 연락을 해두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지속적인 참여를 통해 시스템은 점차 자리를 잡게 되었다. 좋은 협력사례는 기술연구원 월례모임을 통해 공유하고, 신입연구원들에게는 신입교육을 통해 추진하고 있는 제도를 소개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3년쯤 지나자 모든 구성원이 자연스럽게 내부 협업시스템을 활용하여 연구활동을 하는 데 도움을 주고받게 되었으며 8년이 지난 지금은 LG화학기술원의 독창적인 문화로 확실히 뿌리내리고 있다.
“조직의 문화와 체계의 혁신을 위해서는 경영자의 집요함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냥 적당히 드라이브해서는 문화로 체질화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라고 강조한다( 그림 1 참조).
이러한 내부 개방형 혁신은 팀간 협업으로까지 확대되어 차별화된 연구결과를 낳고 있다. 최근 개발에 성공하여 사업화된 ‘3D TV용 FPR’(Film Patterned Retarder) 의 경우가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다.
내부적으로는 CRD(Corporate R&D, 중앙연구소 개념)연구소 1개 연구팀과 정보전자소재 연구소 2개팀 그리고 고객사인 LG전자와 LG디스플레이가 하나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각자의 기술과 역량을 결집해 개발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그림 2 참조).
“협업을 통해서 얻어낸 성과들은 남들이 모방하기 어려운 경쟁우위를 가져다 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이것이 협업이 주는 매력이지요.”
세번째는 보상체계에 관한 것으로 내부의 다른 체계에 부합되고 시너지가 창출될 수 있도록 새로운 개념을 정립한 후 실행하고 있다.
“하나의 제품이나 단위기술을 개발하는 데는 많은 연구자와 지원 인력들이 필요합니다. 그만큼 누가 언제 어떤 식으로 기여하였는가에 대해 명확한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추적해서 보상을 해줘야 하는데, 가급적 노력의 대가, 즉 보상은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노력에 대한 인정은 조직을 더욱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반면,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조직이 와해되면서 그에 내재되어 있던 기술역량마저 잃게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앞서 언급한 3D FPR 기술에 성공한 연구원들 중 일부는 그 이전에 다른 광학용 고분자 개발에 투입되어 연구개발하던 연구원들이었다. 한창 연구 중이던 과제가 사업전략상의 이견으로 중단되는 일이 발생했다. 연구자들은 심하게 방황했고 몇몇은 회사를 떠날 생각까지 했었다.
“당시에는 참 암담했지요. 사실 연구원들은 잘못한 게 없었어요. 사업부와 경영층의 의사결정 문제였으니까요. 그래서 저만큼은 결과보다는 그들의 연구개발 진행과정과 성과를 냉철하게 바라보기로 했고 그들의 연구성과를 인정하여 적절한 보상을 했습니다.”
그의 통크고 현명한 결단에 8명의 연구원은 모두 회사에 남았고, 결국 ‘3D TV용 FPR’의 핵심인 광배향 물질을 세계최초로 개발해 내는 성과를 낳았다.
“경영자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잘 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들은 오히려 그냥 내버려둬야 좋은 성과를 스스로 만들어내죠. 문제는 실패한 연구자들을 어떻게 매니징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 그들이 실패의 경험을 딛고 더 큰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21세기 성공인재의 조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유진녕 사장은 대학에서 강연을 많이 한다고 한다. 이때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동안 조직내에서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결과 인정받고 성공하는 인재들에게는 네가지 공통점이 있더라구요. 첫째는 ‘열정’이에요. 저는 지금까지 열정이 없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특히 연구원들의 경우 연구에 대한 열정이 없으면 창의적 아이디어는 결코 창출될 수 없으며 연구에 대한 집요함이 바로 창조의 힘이라고 강조한다.
성공인재의 두번째 조건은 자기분야에서만큼은 최고의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연구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기본이 바로 전문지식인 것이다.
다음 세번째 조건은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혁신하라고 강조한다. 하나의 성공이나 실패에 일희일비하거나 좌절해서는 안되며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혁신해나가는 데서 새로운 아이디어와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오늘날의 기술과 지식은 참으로 넓고 깊기 때문에 혼자만의 실력으로 목적을 이루기 어려우므로 나 자신 이외의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꼽는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들 가운데 어느 한두가지가 아닌 이 네가지 조건을 모두 갖출 때 좋은 인재가 될 수 있다고 하니 지금이 있기까지 이 네가지 덕목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그의 지난 모습들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좋은 경영이란 무엇인가
어느새 한 해의 끝. 올 한 해는 유진녕 사장에게는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2014년 정기인사에서 사장으로 승진한 데다 2005년 LG화학기술연구원 원장의 자리에 오른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LG화학 R&D부문의 최고수장으로서 열정과 혁신의 시간을 살아온 그는 과연 어떤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성공한 선배로서 다른 기술경영인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기술경영인은 현재의 사업뿐 아니라 기업의 미래와 지속적 성장을 위한 균형잡힌 ‘양손형(Ambidextrous) R&D’ 전략을 추구해야 합니다. 단기적 성과는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연구개발의 에너지를 여기에만 집중해서는 기업의 미래는 기약하기 어렵죠.”
또한 스스로 전임 기술원장이 심어놓은 묘목 덕택에 전기차 배터리 개발이라는 열매를 수확할 수 있었던 만큼 자신 역시 후배들이 크고 알찬 열매를 수확할 수 있도록 좋은 씨앗을 뿌리고 묘목을 심겠노라는 다짐의 말도 잊지 않는다.
“언젠가 후임 원장이 새로운 신사업 기회와 성과를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도록 Seeds를 준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경영활동입니다.”
언제나 ‘좋은 경영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생각한다는 그는 ‘경영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상식의 실천이다’는 말로써 평소의 철학과 소신을 보여준다.
“사람의 마음을 사라, 솔선수범하라, 소통을 잘하라 같은 말들은 우리가 다 알고 많이 하는 것들이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알기만 할 뿐 직접 실천하지 않는 거에요. 경영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들을 그대로 적용하고 실행한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R&D경영에 대해서는 ‘실패를 잘 관리하라’고 조언한다.
“흔히 성공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못한 사람에게는 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공한 팀이나 조직에게는 포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실패한 사람에게 무조건 벌을 주어서는 안되죠. 최선을 다한 실패라면 그 과정을 인정해 주고 격려해야 다시 높은 목표에 도전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어떤 점을 보완해 나갈지, 언제나 경영자는 잘 안되는 사람과 조직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후배 연구원들에게는 자신의 ‘행동과 사고의 속도’(Pace)를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즉 자신의 결과를 모두 보여주면서 일정맞추기에 급급해서는 연구를 자기 페이스대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항상 미래를 앞서 준비하면서 연구를 자기 페이스대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연구를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수천명에 이르는 연구원들의 이름을 외우려 노력하고 가능한 많은 연구원들과의 식사자리를 통해 그들의 현안이 무엇이고, 어려움은 무엇인지, 최고경영인으로서 어떤 도움과 조언을 줄 수 있을지 언제나 부지런히 살피고 마음을 다하는 유진녕 사장.
R&D기반의 사업성과와 미래의 먹거리 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과거 LG화학의 영광과 희망의 미래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