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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 엣세이 - 에디슨형 인재가 나와야 한다

플러스 엣세이는 사회저명 인사가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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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대 문명사회를 살면서 전기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에디슨은 우리에게 전깃불을 가져다 준 사람이다.
 
전기의 기원을 따지자면 고대 그리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전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것을 놓고본다면 1831년에 영국의 마이클 패러데이가 전자기유도 현상을 발견한 데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는 1880년을 전후해서 미국의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비롯하여 발전기, 송전선, 배전반, 변압기, 소켓, 스위치, 안전퓨즈, 적산전력계 등 전기사용과 관련되는 주변기기까지도 같이 창조해냄으로써 전기문명 시대를 연 것이다.

발전기든지 전동기든지 하는 것들을 달랑 하나나 둘 정도만 만들고 끝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에디슨은 과학자라기보다는 발명가라고 한다. 그의 생애 84년 동안 총 1,093건의 발명특허를 받아 발명왕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그가 대단한 것은 발명건수가 많은 것도 있지만,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전기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이 이미 알아낸 진주같은 사실들을 하나하나 실에 꿰어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물론 진주목걸이 만들 듯 기술적 진주를 실에 꿰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았을 거라는 상상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에디슨은 패러데이가 쓴 「전기에 관한 실험연구」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 책에는 복잡한 수학방정식이 전혀 없고, 많은 실험적 사실에 대하여 쉬운 문장들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실험을 계속해 보다가 1868년 그의 나이 스물한살에 전기투표기록기를 발명하여 처음으로 특허를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서 창조력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스물아홉살부터 서른네살 때까지였다고 한다.

그가 개발한 특허품으로 모두 많은 돈을 번 것은 아니었지만 뉴욕 주식시장의 자본가들은 그의 발명품을 잡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였다.

패러데이는 에디슨과 같이 정상적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접근방법이 복잡한 이론보다는 단순하고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그 둘은 통하는 바가 많았을 것이다. 초등학교 교육 3개월이 공교육의 전부인 에디슨처럼 패러데이도 열두살 때부터 부모 곁을 떠나 서점겸 제본소의 사환이 되었고, 그 후부터 독학과 어깨너머로 보고들은 걸 바탕으로 그의 호기심을 채워나갔다.

1821년 패러데이는 도선에 전류가 흐를 때 주변에 있는 나침반의 바늘을 움직이게 한다는 사실을 덴마크 과학자 외르스테드에게 들었다.

거기서 페러데이는 생각했다. 전류가 흘러 나침반 바늘이 움직였다면 나침반 바늘을 움직이는 것으로도 전류가 흐르지 않을까? 그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10년을 씨름했다. 드디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전자기유도 현상이다.

전기와 자기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기초과학(Science) 연구의 결과다.

이것은 20여년 뒤에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맥스웰이 방정식으로 증명해준다. 현상이 법칙이 됐고, 증명수학(Mathematics)이 이렇게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기서 한발더 나아가, 도넛형 코일뭉치 가운데에 막대자석을 넣은 장치를 만들어놓고 막대자석을 회전시키면 코일뭉치에 전기가 발생한다. 발전기의 원리다.

다른 방법으로, 코일뭉치 쪽으로 전류를 흘려보냈더니 막대자석이 회전을 한다. 전동기(모터)의 원리다. 이것들은 응용기술(Technology) 개발의 결과물이다.

이런 원리를 에디슨이 이어받아 발전소를 건설한다. 생활공학(Engineering)의 결과다. 극도로 복잡하고 종합적인 원자력발전소를 엔지니어링의 꽃이라고 한다.

전기를 사람들이 이용하게 하려면 전기제품을 편리하고 예쁘게 만들어야 하니까 디자인 예술(Art)이 필요하다.
 
그래서 STEAM(융합)을 해야한다는 이유를 에디슨이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패러데이나 에디슨은 수학을 몰라도 연구성과를 냈다. 가방끈이 짧다고 포기하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거다. 패러데이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살았던 그는 단지 신이 창조한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에 만족하고 기뻐했다.

하지만 유대인 에디슨은 상업적 마인드를 가지고 특허내고 돈버는 데 몰입했다. 기초과학의 발견이 응용기술의 발명으로 이어지는 좋은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발견(Discovery)은 남이 미처 보지못한 사실을 먼저 찾아내는 것이고, 발명(Invent)은 전에 없었던 것을 새로 생각해내거나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에디슨은 엄청난 노력파다. “천재란 99%가 땀이며, 나머지 1%가 영감이다.”라는 모토로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나 이전의 마지막 사람이 멈추고 남겨놓은 것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듯이 부가가치를 높이는 일에 집중했다.

그는 백열전구를 발명할 때 필라멘트 재료를 무수히 바꿔가며 4만달러의 비용을 들여 1,200회 넘는 실험을 거듭한 끝에 40시간 동안 빛을 내는 전구를 만들어냈다.
 
1879년 10월 21일이다. 곧바로 11월 4일에 특허신청을 했고, 두달여 지난 1880년 1월 27일에 승인되었다.

그러나 에디슨은 특허소송에 휘말려 큰 돈은 못벌었다고 한다.
 
결국 1889년에 법원은 에디슨의 고 저항 탄소 필라멘트 특허를 인정해 주었지만, 에디슨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개발해 놓은 성과물들을 가지고 시작했으니 특허권 다툼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오직 에디슨뿐이다.

윌리엄 소여나 조지프 스완 등 많은 과학자들은 단순히 백열전구라는 개념만 연구개발 성과로 가지고 있었다.

에디슨은 일반시민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오랜시간 동안 빛을 내는 방법을 찾았고, 발전소에서 공급되는 전기를 사용하기에 적합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정보화혁명을 일으킨 애플의 스티브 잡스를 제2의 에디슨이라고 일컫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가 만든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도 이전에 개발되어있던 기술들을 가져다가 탁월한 디자인을 가미해서 세상을 바꾼 것이다.

에디슨이 어렸을 때 헛간에서 달걀을 품은 것을 천재의 엉뚱함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아니다. 자기가 생각한 대로 해본 것이다.
 
어미닭이 품으니까 알에서 새끼가 나오네. 그럼 내가 품어도 새끼가 나올까? 하고 생각한 대로 해본 것이다. 단순히 지식만 암기한 사람은 절대 그런 행동을 할 수 없다.

독서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그냥 책만 읽어가지고는 큰 의미가 없다. 생각하면서 읽어야 진짜 독서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세계최고의 과학자 뉴턴과 아인슈타인도 그렇게 책을 읽었다는 거다.
 
아인슈타인은 “상상은 지식보다 중요하다”(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고 했다.

생각이 중요하고 행동해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어떤 사람은 ‘1×3 = 3×1’의 공식을 제시하기도 한다.

한권의 책을 세번 읽은 것이 세권의 책을 한번씩 읽은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책을 깊이있게 읽어야 한다는 얘기고, 생각과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에디슨은 하루 24시간이 부족했다. 수많은 실험을 하느라 잠자는 시간은 보통 하루에 3~4시간이었다. 연구와 개발이 그의 놀이였고 생활의 전부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 피곤하지도 않았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에 첫번째 부인 메리가 지병으로 죽고, 서른아홉에 스무살의 매력적인 여성 미나 밀러와 재혼했지만, 가정에는 무관심한 채 실험실에만 처박혀 살았다.

미나는 “에디슨은 온종일, 심지어는 꿈 속에서도 발명을 해요.”라고 말했다.

잠잘 거 다 자고, 놀 거 다 놀고, 만나고 싶은 친구 다 만나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아주 평범한 상식을 에디슨은 보여준 것이다. 그렇게 혹독하게 일했지만 84세까지 살았다.

에디슨에게는 이론과 미사여구와 체면이 없었다. 오로지 사실과 노력과 용기가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세상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기를 내십시오! 나는 사업하면서 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뭔가 더나은 방법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걸 찾으세요. 열심히 일하는걸 대체할 수 있는 건 세상에 없습니다.”

패러데이가 만들어낸 전자기유도 현상을 에디슨이 이어받았다. 수많은 전기기구를 만들어 내어 전기산업을 일으켰으며 오늘날의 전기문명을 꽃피웠다.

에디슨이 활동하던 뉴욕에 기술과 자본이 쌓이다보니 문화예술가들도 몰려들어 뉴욕은 창조의 도시로 변했다. 15세기 이태리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된 것과 같은 형국이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일자리에서 돈을 벌고, 밤을 대낮같이 밝힌 세상에서 또다른 문명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기초과학-응용기술-산업생산-일자리창출-국민복지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미래창조과학의 실제모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