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플러스 엣세이 - 공돌이의 모험

플러스 엣세이는 사회저명 인사가 기고한 글입니다.


공돌이1.png

공돌이2.png


2009년 1월 12일 새벽 전화소리에 깨어 핸드폰을 보니 국제전화였다.

“Hello, this is Kim’s speaking.”

“Hi, Dr. Kim, this is Bell Stuart, Dean of School of Engineering, University of Kansas. Congratulation on your becoming a recipient of Distinguished Engineering Service Award(DESA) 2009 of School of Engineering, the University of Kansas.”

이른 새벽에 필자가 1980년부터 1986년 미국 유학기간 동안 공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던 모교인 캔자스 대학교(University of Kansas(KU))의 공대학장인 벨 스튜어트가 직접 전화로 미국 캔자스공대 2009년 최우수 동문상(DESA)을 받게됨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시상식은 2009년 5월 7일 250여명의 주요귀빈 등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캔자스대학교 메인캠퍼스가 있는 캔자스주 로렌스시 캔자스유니온에서 개최되었다.

캔자스대학교는 미국 캔자스주 주립대학으로 1864년에 설립되어 140년의 역사와 학생수 3만여명을 자랑한다.

특히 공과대학은 1980년부터 매년 사회저명인사로 구성된 46명의 자문위원회에서 엄격한 심사기준을 거쳐 가장 우수한 동문 2~3명을 선정하여 DESA상을 수여해 오고 있다.

대표적인 선정인물로는 크라이슬러(Chrysler) 자동차 회장이었던 로버트 이튼(Robert Eaton), 미국 최초 항공우주인 조 엔겔(Joe Engel), 필립스(Phillips) 석유회사 사장 스탠리 러니드(Stanley Learned), 블랙앤비치(Black & Veach) 회장 짐 아담(Jim Adam), 스탠리(Stanley)그룹회장 그래그 토모풀루스(Greg Thomopulus), 중국 철강그룹회장 모희 킹(Mou Hi King) 등이 있다.
 
선정된 최우수동문은 공과대학의 상징건물인 이튼(EATON) 건물 2층의 ‘명예의 전당’에 초상화와 간단한 업적이 영구적으로 전시 및 보관된다.

1980년 12월 당시 한국에는 흑백TV 시대였고 거리의 자동차도 뜨문뜨문 다녔던 시절 동양의 가난한 나라였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랑스럽고 자신감에 넘쳤던 필자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 시카고를 거쳐 경비행기를 타고 시골의 작은 학교도시인 캔자스주의 로렌스에 도착해서 본 미국의 당시풍경은 그야말로 천지개벽같은 수준이었다.

학교 주차장에는 차가 넘쳐나고 있었고 아름드리나무가 울창하게 하늘높이 뻗어있는 풍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학교 수업시간에 들어가보니 학생들 모두가 개인용 계산기를 갖고 있어서 이상하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프로그램이 가능한 공학용 계산기였다.

지금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당시 한국에선 개인용 PC는 생각도 못하고 메인 프레임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는 단말기조차 부족한 시절, 한 학기내내 Fortran 프로그래밍 몇줄 작성해보고 기말시험으로 제출하면 키펀치를 거쳐 학기말에 결과를 받아본 게 전부였다.

천국에 온 것 같았고 ‘이런 세상도 있구나’를 연발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미국은 당시 동경의 나라였고 모든 백인들이 우월하게 보였으며 미국인들과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어떻게든 노력해서 미국인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1986년 5월 박사학위를 받고 23년이 지난해에 동경의 대상이었던 캔자스대학교 공과대학 이튼홀에 외국인으로 처음이고 동양계로는 두번째로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캔자스대학교 기계공학과 자문위원으로 위촉받아 모교를 방문하면서 한국 유학생들을 만나게 되면 “저도 나중에 교수님처럼 잘되어 캔자스대학교 명예의 전당에 오르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는 희망의 소리를 종종 듣게 되는데 그럴 때면 지난날의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은 한꺼번에 사라지곤 한다.

사실 필자 또한 지난날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여러가지 어려움과 변화가 많았다.

공학을 전공한 필자는 언제부터인가 ‘공돌이’란 말을 좋아하게 되었다.

독일의 마이스터, 일본에서 가업의 대를 잇는 장인, 미국의 청바지를 즐겨입는 카우보이를 중시하는 외국의 실천적 정신은 공학을 현실에 적용하는 데에 꼭 필요한 사회적 문화이다.

그러나 오랜기간 동안 사농공상(士農工商) 사상에 물들어 왔던 대한민국에선 공돌이로 살아가기란 결코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기회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과학, 기술, 기능이라는 출신성분이 보약이 되기도 하지만 약점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공돌이가 정부의 고위직이나 기업의 임원자리 그리고 교육기관의 행정직에 맡겨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았고 능력 또한 부족함을 느꼈다.
 
이는 우리사회 자체가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스패너를 들고 다니거나 실험실에서 하얀 실험복을 입고 인류에게 이로운 자연이론을 적용하기 위하여 하루하루를 보내는 공돌이에 대한 인식이 소통을 못하고 꼭 막혀있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면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돌이 스스로가 보다 폭넓은 전문성을 갖고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도전해야 된다고 판단했다.

1984년 1월 대학재학 중 합격한 제13회 기술고등고시로 근무를 시작했던 국방부 방위산업국 사무관직을 미국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계속하기 위하여 사직했다. 당시에는 학업을 계속하기 위하여 휴직이 허용되지 않았다.

1986년 5월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선진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이곳저곳에 지원한 결과 원자력발전소 엔지니어링업체인 미국 깁스앤힐(Gibbs & Hills)社에 취업이 되었다.

텍사스 글렌로즈(Glen Rose)에 있는 핵발전소 건설현장에 투입되어 작업모를 쓰고 설계기준을 확인하며 상세도면을 들고 다니면서 매일매일 제대로 공사되어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주업무였다.
 
PC의 도입이 현장에 시작될 무렵 시스템 설계에 프로그래밍을 도입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로 회사에 공헌하였고 한편으론 현장기술을 많이 배웠다.

그러나 미국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점점 줄어들면서 원자력설계 엔지니어보다 기구축된 발전소 운전 엔지니어가 필요하게 되면서 단순한 운전업무로의 근무변경을 요청받았다.

필자는 또다른 도전으로 미국 동부의 아이비리그 대학인 예일(Yale)대학교 기계공학과 연구교수직에 지원하게 되었다.

담당업무는 NASA에서 지원하는 “무중력 상태에서의 열적현상에 의한 물질전달의 수치해석” 분야였고 우수한 연구업적을 내어 예일대학교 정교수가 되는 게 목표였다.

예일대 데이비드 라즈너(David Rosner) 교수가 운영하는 고온도 화학반응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 또다른 도전이 찾아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면서 귀국에 대한 욕망을 부추겼고 마침 1989년 이건희 회장의 해외유치과학자 프로그램에 의하여 삼성항공 제어시스템 부장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삼성그룹에서 생산시스템의 자동화관련 기획, 영업, 설계업무를 총괄하면서 기업의 혹독한 독립체산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영업을 배우고 기업의 핵심인 기술 및 순이익관리 부족으로 간부회의 때 지적을 당하고 대책을 강구하라는 본부장의 명령은 대학에 온 지금까지도 평생 귀한 경험이 되었다.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의 끈질긴 만류에도 불구하고 1992년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초창기 멤버로 참여하게 되면서 필자의 인생목표는 다시 바뀌게 되었고 고국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하는 학자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다.

한국기술교육대학교는 1992년 정부(고용노동부)가 설립한 신설대학으로서 대학원생과 연구지원 시설 등 많은 면에서 부족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교육과 연구에 매진하였다.

연구를 위하여 대학원생이 없으면 학부생과 타대학 대학원생을 활용하였고 부족한 실험시설은 해외대학과 국책연구소에 부탁하였다.

이를 인정해서인지 2006년 대통령 근정포장, 2007년 산업자원부장관 표창, 미국 기계학회 펠로우(Fellow) 추대, 2008년 교육과학기술부 100대 최우수연구과제 선정,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회장, SEMI표준화 위원회 한국대표, 한국산학연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동안 한국과 미국을 왔다갔다 하면서 공돌이로서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고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도전하다보니까 어느날 갑자기 전화 한통이 미국에서도 날아온 것이었다.

여러면에서 부족하고 30여년 전 이름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한국의 유학생 공돌이가 90% 이상의 백인이 참석한 캔자스대학교 DESA 증정식에서 기립박수를 받는 잊지못할 추억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