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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칼럼 - 진도 ‘명량’에서 다시 읽는 난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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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作 < 난중일기 >

팽목항으로 유명해진 진도는 최근 영화 < 명량 >으로 인해 다시한번 유명세를 치렀다.

진도에 가면 명량의 회오리바다를 직접 볼 수 있는데, 그 바다를 내려다보는 진도타워에는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의 한 대목이 탑으로 세워져 있어서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충무공이 남긴 ‘난중일기’(亂中日記)는 그가 남긴 또하나의 불멸의 신화다.


글_ 박은몽 소설가


한반도 육지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섬 진도. 땅끝마을 해남 바로 인근에 위치한 데다 그리 길지도 않은 진도대교로 금세 건너갈 수 있는 진도는 섬이라기보다는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어온 육지 같다.

그 찰랑대는 바다가 바로 명량해협이다. 그 폭은 한강 폭의 반에도 훨씬 못 미쳐서 가장 좁은 지점은 300미터가 채 안된다. 좁고 물살은 급하다.

얼마 전 진도에 갔을 때 그 물살을 내려다보니 과연 장마철 강의 상류처럼 물살이 빨랐다.
 
그런데 물살이 가장 빠른 물때에 비하면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그처럼 급한 물살을 타고 서진해 온 왜군을 맞아 싸운 충무공의 모습이 영화 속 장면과 겹쳐 떠올랐다.

서해로 꺾어지기 직전에 있는 길목의 바다를 막았으니 왜군의 북진은 한풀 꺾일 수밖에 없었다.
 
“바다를 잃으면 조선을 잃는다.”는 영화 속 대사가 진도대교 앞 바다를 보고 있으니 실감이 났다.

또한 < 난중일기 >에서 충무공은 직접 그날의 일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 난중일기 >가 보여주는 명량해전

명량해전은 < 난중일기 >상으로 9월 16일에 있었다. 양력을 사용하는 지금으로 치면 아마 10월의 어느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결전을 앞두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면서 충무공은 “그리운 생각에 눈물이 흐른다,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겠는가! 심회를 걷잡을 수가 없다.” 하며 초조해 하다가도 장수들 앞에서 “살려는 생각을 하지 마라. 병법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다고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사람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를 했다.

결전의 하루 전인 9월 15일의 일이었다. 아마도 충무공은 왜군의 총공격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는지 모른다.

그날밤에는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고 일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온 영혼을 다 걸고 전쟁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적인 고뇌와 두려움을 넘어 결전을 준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진실한 용기와 지략은 두려움을 넘어선 용기에서 나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신인이 가르쳐 준 전략인지, 그는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미 명량의 물살을 이용한 결전을 치르겠다는 결심이 섰음을 알 수 있다.

그 다음날인 9월 16일 명량해전 당일의 기록을 충무공은 다른 날과 달리 대단히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장선 홀로 적진 속에 들어가 포탄과 화살을 쏘아대던 일, 피할 궁리만 하는 장수들을 초요기로 불러들여 안휘와 김응함 등에게 호통치던 일, 적장 마시다(영화에서는 ‘구루지마’로 불림)의 시신이 물에 뜬 것을 발견하고 끌어올려 토막내서 적의 사기를 크게 꺾어버린 일 등이다.

긴 서술 끝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것은 실로 천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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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한 고뇌와 고독의 기록

< 난중일기 >는 7년간의 임진왜란 중에 충무공이 직접 써내려간 진중일기이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역작이지만 고서(古書)라서 그런지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

딱딱할 것 같지만 막상 풀이해서 나온 시중의 책을 읽어보면 담담하게 써내려간 한 남자의 일기이다.

충무공의 필체는 담담하고 차분하다. 언제나 그날의 날씨를 간략하게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기보다는 보고서를 쓰듯 간결하다. 그러나 그 간결한 문체들 속에서 충무공은 격정을 토해내곤 한다.


선조와 조정대신들의 시기를 사서 삭탈관직된 데다 어머니의 죽음을 당한 선조 30년 4월 16일에는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라고 적고 있다.

4월 19일에는 “어머니 영전에 하직을 고하며 울부짖다. 천지에 나와 같은 사정이 어디 다시 있으랴! 일찍 죽느니만 못하다.” 하고 비통해 하고 있다.

그 어떤 시련 앞에서도 초연할 것 같은 영웅이지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며 뼈아픈 속내를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해 7월 충무공을 대신하던 원균이 7월 16일 칠전량에서 대패했다는 소식과 함께 “대장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장수들 여럿도 힘써 뭍으로 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받고 밤늦도록 눈을 붙이지 못하다가 눈병이 났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전쟁 중에 어머니를 잃고 수많은 부하들을 잃으면서 철저하게 고독한 시간을 버텨야 했던 인간 충무공의 가슴은 아마도 타버린 재처럼 시커멓게 되었을 것이다. 한줄한줄 써내려간 일기가 그의 유일한 안식이자 위안이었으리라.

명량해전 다음해인 1598년 8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철병(撤兵)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자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충무공은 노량 앞바다에서 일본의 철수병력과 맞서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 난중일기 >가 세상에 조금씩 드러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 200년이 지나서였다.
 
정조(正祖)는 임진왜란 발발 200주년이 되는 1792년(정조 16년)에 충무공을 영의정으로 가증(加贈)했다.

그리고 충무공의 글과 그에게 준 글들을 모아서 < 이충무공전서 >를 편찬했는데 이 중에서 ‘전란 중의 일기’ 부분에 대해 ‘난중일기’란 이름을 붙였다.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는 이충무공의 친필 초고본인 <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 >는 전쟁기록, 학술연구 자료로서 높은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휘관이 직접 기록한 유래를 찾기 힘든 사료인 점 등이 인정되어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