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술경영인인터뷰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 - (주)산청 김종기 회장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그리고 향후계획 등을 알아봅니다.

공동작성_
이동기 대표((주)SBP전략경영연구소)
이정선 전문작가(프리랜서)
이종민 과장(산기협)


끝없는 도전과 혁신으로
대한민국의 안전을 책임진다

 

최1.JPG


아이언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 속의 주인공들을 우리는 영웅이라 부른다.

이들은 수많은 위험과 장애를 극복하며 혼자서 수십, 수백의 악당을 물리치는 활약을 펼치며 세계 영화팬들을 사로잡는다.

실제로 포브스가 뉴욕에 거주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장래희망을 조사한 결과 미취학아동에게는 슈퍼맨, 6세 이상 초등학생들에게서는 소방관이나 경찰관이 되고 싶다는 응답이 많았다고 한다.
 
단지 멋져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연예인을 장래희망으로 꼽는 한국의 아이들과는 대조된다.

일상생활을 비롯한 모든 분야가 고도정보화되고 스마트화 시대에 접어들었지만 화재와 재난의 현장에 사용되는 소방장비는 노후율이 심각한 데다가 낡은 장비로 생사의 현장을 넘나드는 소방관들의 희생은 끊이질 않고 있다.

위기와 혼돈 속에 진정한 영웅과 영웅담이 필요한 시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소방관들의 필수품인 구조장비 생산전문기업을 이끌며 40년 외길을 걸어온 최고경영인에게는 어떤 영웅담 같은 이야기가 숨어있을까.



경쟁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산청은 공기호흡기, 방열복, 산소인공호흡기, 방독면 등 화재 및 재난사고에 대비한 안전장비 전문기업이다. 창업 44년이 된 지금 한국에서 공기호흡기, 방열복, 방독면 하면 의례 ‘산청’을 꼽을 정도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산청은 우리가 잘아는 경상남도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산청’(山淸)이라는 지명과 동일한 사명을 사용하고 있다. 공기청정기 등의 청정한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함과 동시에 최고경영자인 김종기 회장의 고향이 바로 산청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인 1937년 산청의 한 시골마을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마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종기 회장의 첫 직업은 신사복 디자이너였다.
 
이렇다 할 경영수업 한번 받은 적 없는 그가 경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30대 초반, 서울의 동대문시장 인근에 양복점을 열면서부터다.

“7남매의 장남이 무슨 이유가 있었겠습니까?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가장 큰일인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이었죠. 그 시절에는 누구나 다 그랬잖아요?”

1970년대 국내 최대규모의 동대문시장을 중심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양복점들이 영업을 하고 있던 시절, 주요 단골손님은 인근 상인이었다. 양복점들간의 경쟁이 그야말로 치열했던 상황에서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남과 다른 전략이 필요했다.
 
당시 양복점들이 문을 여는 시간은 아침 7시가 보통이었다. 하지만 경쟁이 가열되면서 7시에서 6시 반, 6시 반에서 6시로 개점시간을 앞당기는 일이 반복되었는데, 이때 김종기 회장의 생각은 한발 더 나아가 있었다.

“무작정 개점시간만 당긴다고 해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죠.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 끝에 일단 고객과 잠재고객들의 활동패턴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김 회장의 판단과 분석은 예상대로 적중했다. 당시 동대문시장 상인들을 관찰한 결과 그들이 활동하는 시간은 새벽 3~4시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다른 양복점들이 문을 열기 전인 새벽 3~4시에 문을 열기 시작했다.

다른 양복점 주인들이 깊은 잠에 빠져있는 순간 시장의 상인과 고객들을 대상으로 양복점 매출은 눈에 띄게 상승하며 ‘개점시간 전쟁’은 한번에 정리가 되었다.

“새벽에 문을 연다는 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경쟁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획기적인 변화였던 거죠. 그것을 통해 경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까요. 그렇게 양복점 사업을 비교적 순탄하게 이어갈 수 있었던 덕에 동생들 대학공부도 시키고 결혼도 시켰습니다.”


시련 속에서 꽃피운 성공

생애 첫 사업인 양복점 사업은 김종기 회장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옷감의 구입과 디자인, 재단, 가봉 등 옷을 만드는 노하우와 더불어 사업의 가치사슬에 대한 전반적 구조를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그에게 1971년 새로운 사업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김포공항 조종사들의 유니폼을 납품하는 일이었다.

“지인을 통해 김포공항 조종사복 만드는 일을 시작하게 됐는데, 양복점을 운영하는 사람이 조종사복을 납품하는 일을 맡게 된다는 건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정말 대형사업이었죠.”
 
큰 기대와 설렘 속에 시작한 조종사복 납품사업. 하지만 예산의 확보와 사업비가 수령되어야만 비용이 지급되는 관공서 발주사업의 특성상 이득을 보진 못했다.

“우리가 제작한 조종사복은 납품이 완료되었는데, 다른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어요. 활주로의 계기 이착륙 관련기기의 납품을 의뢰 받은 업체에서 불량부품을 사용한 게 감사원에 적발돼 대대적 감사가 진행되면서 대금수령이 늦어졌던 겁니다.”

납품비용 수령이 지연되자 결국 자금흐름이 막히면서 많은 부채를 떠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을까?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김종기 회장은 중요한 사업 아이디어 하나를 얻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소방복’이었다.

당시 소방복은 소재는 물론 전공정기술의 부재로 우리나라에서 직접 생산하기가 어려운 제품이었다.
 
그래서 내구연한이 훨씬 지난 소재를 이용해 소방복을 제작하는 것이 다반사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가격이 20만원이나 하는 고가의 제품이었다.
 
현재의 가치로 따지자면 당시 400~500만원이면 집을 한 채 살 수 있었으니, 지금의 60배 정도 가치로 소방복 한 벌에 1,200만원 정도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동대문의 작은 양복점에서 소방복 샘플 두벌을 제작해 납품하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방화복 사업을 시작한 산청은 1975년과 1976년 각각 국방부 조달품과 포스코(당시 포항제철) 고로작업자의 방열복을 납품하면서 개인보호장비 전문생산업체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업활동 속에서 김종기 회장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지난 시절에 경험한 것들은 결코 어느 것 하나 무의미한 것이 없어요. 미래 비전을 세우고 그것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경험은 반드시 필요한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비록 생계를 위해 산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신사복 디자인과 납품의 경험이 없었다면 다양한 시장을 확보하는 기회를 결코 얻지 못했을 것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최2.JPG



핵심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시장과 경쟁하다

벤처나 스타트업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주력사업 외에 새로운 성장엔진을 지속적으로 찾는 경영진의 노력이 필요하다.

산청이 지금의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데는 바로 최고경영자인 김종기 회장의 노력이 있었다.
 
방화복과 소방복 납품을 시작하면서 산업의 변화와 사회의 크고 작은 사건이나 이슈들을 관찰해온 그는 1970년 부산 해운대의 극동호텔 화재와 이듬해 서울 대연각호텔의 화재를 보면서 열악한 환경에서 인명을 구조하는 소방관들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아침 165명의 사망자와 68명의 부상자를 낸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는 화재사상 최악의 인명사고로 기록되는데요. 당시 소방관들이 가장 안타까워했던 것은 공기호흡기만 있었어도 이렇게 많은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사실 1970년대부터 1980년 중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소방방재 현실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일본으로부터 중고 소방차를 도입하면서 함께 들여온 중고장비와 미군으로부터 사용연한이 만료된 장비를 구입하여 활용했던 시절이었기에 그 누구도 이 사업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공기호흡기 사업이야말로 산청의 미래사업이 될 수 있는 매력적인 시장으로 보였다.

“1980년대 이 장비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5개국이 전부였는데요. 결국 어렵더라도 한번 도전해 볼 가치는 있겠다고 생각하고 당장 기술개발에 매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국내에 관련지식을 가진 사람을 찾기조차 어려운 현실에서 당장은 해외수입을 통해 공급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기술력을 내재화하는 데 주력했다.

“이 공기호흡기가 보기에는 매우 간단하게 보입니다만 약 450개의 부품이 결합되어 있어 굉장히 만들기 어렵습니다. 공기를 약 1/300로 압축하여 주입하고, 다시 역으로 2단계의 감압과정을 거치도록 하여 사람이 호흡할 수 있게끔 한 것이지요.”

공기호흡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기술은 2차 감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밸브인데,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 계속 되었다. 그렇게 1980년 시작한 공기호흡기 개발은 1984년 마침내 국산화에 성공했다.

“정말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결국 우리의 독자기술로 개발에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술 때문에 선진국으로부터 많은 견제와 압박도 받았습니다. 그만큼 우리기술이 뛰어났다는 증거이지요.”

오늘날과 같은 글로벌 경쟁상황에서는 대기업은 물량게임으로 승부를 걸어볼 수도 있겠지만 중소기업에게는 오로지 선행기술개발로 시장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글로벌경쟁 상황에서 김종기 회장이 제품개발과 관련하여 철저하게 지키는 원칙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를 따라해서는 결코 경쟁력있는 제품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늘 우리의 기술로 우리가 직접 만들 수는 없을까를 고민해왔습니다. 결국 독자적이고 새로운 기술로 승부해야 하니까요.”

열악한 국내 소방안전산업의 발전을 위하여 그리고 미래시장을 위해서는 언제나 선행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리라고 왜 항상 그들의 뒤만 보고 가야 합니까? 우리도 제품의 규격과 표준을 미리 만들어두고 해외업체들이 우리나라 시장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둬서는 안됩니다. 우리 제품이 불량이 잦고, 품질수준이 낮고, 생산에 안정성이 부족하면 우리가 배워야 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우리 기술로 제품을 만드는데, 미국이나 유럽의 눈치를 봐야 할 필요는 없죠.”
 
이러한 노력들로 산청은 1984년 국내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한 공기호흡기를 시작으로 1991년에는 방독면 및 방진마스크를 독자기술로 개발하는 등 전문성을 살리면서 사업영역을 넓혀갔다.

“돌이켜보면 산청의 시련은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역시 가장 큰 어려움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의 개인보호장비 시장을 개척하는 일이었습니다.”

안전제품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가적 상황에서 매년 매출의 12% 이상을 R&D에 투자하면서 기술경쟁력을 쌓은 결과 안전제품을 국산화하고 다수의 특허 및 국제특허를 획득해 해외수출의 판로를 개척해나가고 있는 산청은 이제 종합 Safety/Health 전문기업으로 세계시장을 제패하는 일등기업을 목표로 달리고 있다.

 

최3.JPG

▲ 김종기 회장이 제47회 과학의날 기념식에서 과학기술훈장 진보장을 수상하고 있다.
 

최4.JPG


죽어도 안되는 것은 없다

글로벌경쟁 시대에 소위 잘나가는 기업에게는 항상 견제가 따르기 마련이다. 산청 역시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일례로 산청이 공기호흡기의 감압밸브 기술을 개발하자 영국 모기업에서 당장 ‘그 기술은 우리 회사의 기술이기 때문에 제품의 적용과 모든 홍보활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해왔다고 한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주장에 산청은 중동지역에서 열리는 전시회 참가계획을 취소하고 제품을 들고 영국에서 개최되는 전시회로 향했다. 우리의 기술이 그들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직접 인식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독자적인 기술력을 중심으로 글로벌 선행주자들을 넘어서는 우수한 제품으로 승부를 펼치고 있는 산청의 힘은 김종기 회장의 각별한 경영철학과 신념에서 비롯된다.
 
70대의 나이에도 지속적으로 연구 개발 현장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는 그가 강조하는 것은 제품의 개념과 디자인이 정해지면 ‘절대 포기하지 말고 개발하라.’는 것이다.

“요즘의 연구원들은 현실에 너무 빨리 적응하려고 합니다. 적당히 해보고 안되면 중간에 쉽게 포기하는 일이 많아요. 그럴 때 내가 다시 이런 방법도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한번 더 해보면 어떨까?라고 제안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다보면 많은 경우 성공하기도 하고 다른 개발 아이디어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것이 결국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기에 매일같이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김종기 회장은 “죽어도 안된다고 하지 말고 죽도록 만들어 보자. 너와 내가 아니면 20년, 30년이 지나도 그 누구도 이것을 절대 만들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로 연구자들을 독려하고 있다.

김종기 회장이 언제나 강조하는 것이 있다. 모양이나 일시적 기능이 우수한 제품보다는 ‘기본에 충실하고 현장에서 오랫동안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혼(魂)이 담긴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거의 매일같이 수많은 제품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 가운데 오랫동안 사용자들에게 애용되며 그 가치를 인정받는 제품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산청의 제품은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것들이기 때문에 작은 오차, 작은 실수 하나 허용될 수 없고, 기준에서 정하는 내구성과 성능을 충분히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때문에 제품의 현장실험은 그 어떤 것보다 매우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자체 시험설비가 없던 사업초기에는 제품시험연구원에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제품의 신뢰성 확보에 주력하였고, 이후 신제품 개발단계에서는 R&D 재원의 많은 부분을 실험부분에 투자하고 있다.

산청 김종기 회장은 생산이 완료된 제품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진다는 소위 ‘책임경영’을 실천하고 있다.
 
불량과 고장이 거의없는 무결점 제품들을 생산하는 동시에 1년 365일 전국의 소방서 등을 수시로 방문하는 차량 두대를 두고 ‘찾아가는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서비스 차량 한대를 운영하는 데에 소용되는 비용만 연간 10억원 정도라고 하니 중소기업 입장에서 보면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사회와 국가의 안전을 위해 현장 이용자들의 불편함을 청취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개선점을 찾아가는 활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산청’이라는 기업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초창기와는 달리 요즘은 입사를 희망하는 우수인력들이 많은데, 인력의 채용과 운용에 있어서도 김종기 회장의 경영철학은 돋보인다. 사업초기부터 생산기능직과 연구개발직 사원간에 상호존중의 문화가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다.

이것은 사장과 직원, 신·구 인력들간에도 마찬가지다. 직원간, 직급간에는 서로 이질적인 문화가 내재되어 있기 마련인데,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끝에 많은 방안들을 마련해 두고 있다.

“석·박사가 중심이 되는 연구인력에게는 ‘당신들은 절대 생산 라인과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 기능인력의 노하우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그들의 경험을 충분히 이해해야 하고 배워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반면 생산직 사원들에게는 ‘저들은 기술 이론에 대해 지식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기술이론과 논리에 대해 저 사람들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라고요.”

그러는 사이 직원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게 되는 기업문화가 뿌리내리게 되었고 결국 이들의 조화로운 활동은 사업적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
 
기술이나 제품개발은 혼자서 그리고 내부의 자원만으로는 추진이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외부의 다양한 인적네트워크를 충분히 활용하고, 그들과 인간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그가 강조하는 부분이다.

“저는 경제적 이유 등으로 충분히 학교 공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디어는 제가 생각해내더라도 반드시 외부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만나 조언을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만 명확하게 정의된다면 대학이나 연구소 또는 타기업의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정보를 얻거나 지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죠. 처음에는 어려운 작업일지 모르지만 끈기와 집념으로 매달리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신기술이 탄생하고 기술간 융·복합이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는 오늘날 그가 강조하는 네트워크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최3.JPG

▲ 김종기 회장이 소방환경이 열악한 개발도상국(몽골)에 소방차를 무상지원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최6.JPG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제품을 꿈꾸는
영원한 현역


산청은 현재의 사업에 더욱 채찍질을 가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래형 신제품의 개발을 위하여 IT기술과의 접목을 통한 기술에 큰 기대를 걸고 투자를 감행하고 있다.

특히, ‘전방표시장치(HUD;Head-Up Display)적용 소방용 공기호흡기’ 개발이 대표적인 프로젝트이다.
 
현재 화재현장에서는 청각에 의존하는 물리적 경보시스템으로 지휘가 이뤄지고 있는데, 소음과 연기 때문에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화재현장에서 소방대원들이 위험에 처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에 소방대원의 공기호흡기 면체 내부에 HUD를 설치하고 LED 점멸신호를 발생시켜 공기호흡기내 압력의 충전상태를 확인해 소방관의 안전을 최대한 보장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개발하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도전 앞에서 김종기 회장은 실패와 성공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되새기고 있다.

“실패는 성공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연구개발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항상 직원들에게 실패를 통해서 얻은 풍부하고 값진 경험과 지식이 다시 새로운 아이디어로 창출되고, 그로 인해 더 큰 성과를 이끌어내는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조활동의 보상으로 연구원들의 지위 및 처우 개선에 더욱 신경쓰고 있습니다. 우수한 개발실적과 회사에 많은 기여를 한 연구원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이를 통해 R&D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고취시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끈기’와 ‘용기’로 항상 도전하는 연구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반면 김종기 회장 자신은 스스로 회사의 비용을 지출하는 데 매우 주의를 기울인다고 한다. 그래서 공적인 일로 비용을 지불할 때도 가급적이면 자신의 월급을 활용한다.
 
자신이 지출한 회사의 비용 때문에 제품원가가 조금이라도 상승하는 것을 차단함으로써 가격경쟁력을 이유로 저가의 해외경쟁사 제품이 우리나라에 발을 붙이는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인터뷰가 마무리될 즈음 젊은 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양복점 사업을 시작한 김종기 회장의 꿈의 크기도 회사의 성공과 함께 훌쩍 자라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업이 이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국가, 이웃에게 기여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많은 경영자들이 공감하고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업의 나눔활동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 믿는 그는 가장 가까이있는 직원들의 복지에서부터 낙후된 국가들에 대한 지원 등으로 자신이 받은 혜택을 배분하는 데 열심이다.
 
“우리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회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열심히 직원들을 챙기려고 합니다.”

실제로 김종기 회장은 회사 직원들을 위해서 시력교정 수술비 등 의료혜택을 제공하고 사회복지를 위한 기부활동과 소방직원 자녀들의 장학금 지원, 개발도상국을 위한 소방차량 무상지원활동 등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김종기 회장은 10년 전에서야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특별히 시간이 남거나 건강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인적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특유의 긍정적인 사고와 건강함을 무기로 오늘도 현장을 누비는 그는 기술연구소에 들러서 연구원들과 함께 서로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열띤 논의를 펼치는 것을 즐긴다. 기술연구소가 주축이 되어 혁신과 성장을 주도하고 연구개발과제를 성공리에 사업화시켜 세계시장을 제패하는 일등기업을 만들겠다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검증제품, 인증 제품을 사용하자는 목소리 또한 높아지고 있는데요. 실제로 안전제품을 많이 사용하는 만큼 사고발생이 감소한다는 조사결과가 있습니다. 앞으로 안전보호장비에 대해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제품을 만들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신념아래 산청이 설립된 지 44년.
 
여전히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국민의 소중한 생명을 지키고 있는 소방관들과 다른 많은 산업현장과 국가안보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튼튼한 제품을 만들겠노라 공언하는 김종기 회장, 그는 오늘도 영원한 현역을 꿈꾸고 있다.

 

최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