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술경영인인터뷰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 - (주)코오롱중앙기술원 송석정 원장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그리고 향후계획 등을 알아봅니다.

‘계곡’과 ‘바다’를 건너온 연구개발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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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작성_ 정원일 교수(경북대), 김공숙 전문작가(프리랜서), 이종민 과장(산기협)

대 담_ 송석정 원장((주)코오롱중앙기술원)

합성섬유에서 시작하여 신소재 분야에 30년 이상 실패와 성공, 좌절과 도전을 경험한 송석정 원장.

그는 미래 소재산업의 최고를 꿈꾸어온 진지한 연구자이자 연구결과를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 현장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양산해온 접목해온 기술자이다.

또한 아이디어를 상업화하기 위해 소재산업의 조직을 키우고 인재를 육성하는 기술경영인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3천여개의 아이디어 중 상업적 성공의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은 단 하나의 아이디어에 불과하다는 ‘경험의 법칙’이 있다.

아이디어가 선정되면 소형 프로젝트에서 출발하여 차츰 규모를 키워나가면서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을 통해 사업화와 생산성을 올려나가게 된다.

신사업이 걸어가는 여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사업의 씨앗이 되는 기술개발 프로젝트가 ‘죽음의 계곡’(Death Valley)과 ‘다윈의 바다’(Darwinian Sea)를 건너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의 계곡’은 생명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미국 네바다 주의 황량한 땅을 말하는데, 아이디어에서 기술개발, 제품 양산까지의 험난한 길을 일컫는 말이다.
 
‘다윈의 바다’는 악어·해파리 떼가 가득해 일반인 접근이 어려운 호주 북부 해변으로 신제품 양산에 성공하더라도 시장에서 다른 제품과 경쟁하며 이익을 내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을 이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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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정 원장은 개발기간이 길고 성과가 가시화되는 데에도 오래걸리는 소재산업 중에서도 특히 신소재 기술개발에 매진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죽음의 계곡’에서 헤쳐나오기도 했고 ‘다윈의 바다’에서 경쟁자들과 힘든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기술개발의 성공과 실패의 과정 속에서 항시 긍정적 자세로 일관해온 송석정 원장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본다.


차선을 최선으로 만드는 ‘긍정적인 생각’

새로운 일을 한다는 것은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도전정신에서 시작된다.
 
송석정 원장도 대학을 졸업하면서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 취업을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이 컸던 청년시절이 있었다.
 
그는 교장선생님이었던 부친이 일찍 돌아가신 이후로 경제적책임을 지는 장남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졸업 후 바로 취업을 선택했다.

당시 서울대 화학과의 졸업생 대다수가 교수의 길을 택하는 분위기였기에 공부만 하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던 그가 취업을 선택하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코오롱 입사 후 송석정 원장의 첫 근무지는 기초연구 그룹이었다. 신입사원이라 서투르고 생소했지만 긍정적 마인드로 도전을 좋아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선배사원의 연구노트를 보게 된다. 노트에는 ‘타이어코드’라고 하는, 화학섬유를 생산할 때 반드시 필요한 산화방지제(R1, R2)에 대한 메모가 적혀져 있었다.

당시 코오롱은 이 산화방지제가 어떤 물질인지도 모른 채 일본의 한 회사로부터 R1, R2라는 이름의 제품을 비싼 가격에 구입하고 있었다.
 
사실 나중에야 밝혀졌지만, 이 제품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합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코오롱은 이 제품을 원가의 몇배의 가격으로 구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석정 원장은 당시 발령받은지 3개월밖에 안된 초년병이었지만 R1, R2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인지 스스로 밝혀내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후 한달여만에 R1의 정체를 밝혀내었고 3개월 후에는 R2까지 합성해내게 되었다고 한다.

성공적인 성과를 이뤄냄으로써 그는 신입사원 시절에 이미 회사 중역회의에서 두번이나 연구결과를 발표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코오롱 공로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이 일은 자신이 비록 신입사원이기는해도 회사에 기여할 역할이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였고, 또 더나아가 언젠가는 앞서가는 일본 기업을 반드시 기술력으로 제압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갖게 된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담당하는 프로젝트의 연이은 성공으로 1982년에는 사내 최고의 영예인 ‘코오롱 대상’을 최연소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송석정 원장은 엔지니어로서 자부심이 높아진 시점에 회사의 지원으로 미국 유학을 떠날 기회를 얻었다. 그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부지런히 준비하여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그런데 출발을 앞둔 상황에 회사로부터 유학을 1년만 미루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부서에서는 폴리에스테르 필름사업을 새롭게 시작하던 중이었고 “신사업을 반드시 성공시키라”라는 미션까지 부여받은 터였다.
 
필름사업은 회사 입장에서는 향후 운명이 달린 매우 중요한 사업이었다.

송석정 원장은 일이냐 유학이냐의 갈림길에 서서 갈등했지만 결국 신규사업을 성공시키기로 마음먹고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송 원장은 최선을 다해 사업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런데 막상 일을 추진하다 보니 당초 1년으로 계획했던 일이 무려 3년이나 걸리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일 때문에 미뤄온 유학을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 아쉬움이 남은 포기였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실사구시형 박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국내 대학원에 입학한다.

이때 그는 업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분자 분야를 전공하기 위해 모교인 서울대 대학원 화학과가 아니라 고려대 대학원을 선택했고, 대학졸업 후 15년만에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비록 유학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고 국내 박사학위 취득이 대안이기는 했지만 “현장과 연결된 기술사업화의 완성자로서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송석정 원장은 소신있게 말했다.


기술개발 실패의 수렁, ‘죽음의 계곡’에서 빠져나오기

화학소재분야에서 코오롱은 세계유수의 기업들과 보이지 않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점기술은 살려서 미래의 성장엔진으로 전략적인 개발을 통해 지속적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송석정 원장은 미래 핵심소재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탄소나노튜브’ 복합체 제조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사업화를 추진해왔다.

그러나 국내의 실력이 그만그만한 기술집단에게 이 기술은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빠져나와야 하는 우물이자 계곡이었다.

실력이 없는 기술집단은 기술의 우물이 마르기 전에 무언가 지렛대를 활용하여 빠져나와야 했다.

무엇인가 남다른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2004년 그는 일면식도 없는 상황에서 코오롱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는 NASA에 무모한 도전을 한다.
 
담당자와 1천여통 이상의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코오롱과 협력하면 NASA의 주력분야인 항공소재 기술뿐만 아니라 연관산업까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초일류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타사의 개발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남보다 한발 앞서서 한단계 높은 기술개발을 해내야만 하기에 싸움의 칼자루를 쥐고 싶었던 것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NASA와 공동개발에 착수하였고 그 결과 코오롱은 2009년 미항공우주국 NASA로부터 미국외의 해외기업으로서는 최초로 최고권위의 상인 ‘W&H 기술이전상’(Whitcom & Holloway Technology Transfer Award)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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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코오롱은 해당 분야의 신속한 개발과 상용화 성공을 국내외에 널리 알릴 수 있게 되었다.

송석정 원장은 회사의 성장을 위해 세계최고의 기술로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죽음의 계곡’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는 ‘헤라크론’이라는 섬유를 개발할 때의 아픈 경험을 간직하고 있었다. 헤라크론의 개발은 2003년 12월 잠시 코오롱 협력사로 떠났다가 코오롱중앙기술원장으로 복귀하면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당시 그룹은 강성노조와의 마찰로 회사 성장이 정체되고 적자를 면치 못하는,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다고 한다.
 
그가 원장으로서 해야 할 일은 현재의 주력사업을 다시 정상궤도로 올리는 것과 향후 성장을 위한 세계최고의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개발을 시작한 소재 중의 하나가 아라미드였다. 아라미드 섬유는 나일론을 대체할 첨단소재로서 5mm 정도 굵기의 가느다란 실로 구성돼 있지만, 2톤의 자동차를 들어올릴 만큼 고강도·고탄성률을 자랑하는 강철보다 강한 섬유이다.

아라미드의 개발은 1978년에 착수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2005년이 되어서야 결실을 볼 수 있었다. 송 원장 스스로 가장 보람된 일 중의 하나로 ‘아라미드’(Aramid) 기술을 국내 1위, 세계 3위로 끌어올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죽음의 계곡’에서 빠져나오기까지 깊고도 고독한 전쟁이 있었다.
 
2014년 초 언론을 통해 총성없는 ‘기술전쟁’ 사례로 코오롱의 ‘아라미드’ 소송이 언급되었다. 이 전쟁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2005년 코오롱이 자체로 아라미드 섬유를 개발해 ‘헤라크론’이라는 브랜드로 시장에 진출하자 2009년 ‘케블라’로 시장을 석권해온 듀폰이 영업비밀 침해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차 판결에서는 헤라크론의 판매금지가 결정됐으나, 2014년 초 미국 항소법원은 1차 판결을 무효화하고 파기환송했다.

사건은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이에 코오롱 그룹의 주력 계열사 코오롱인더스트리는 첨단 합성섬유 아라미드를 둘러싼 미국 화학회사 듀폰과의 1조원대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역전극을 연출해냄으로써 ‘소송 리스크’가 초래한 경영상의 불확실성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주식가치에 영향을 미친 이 사건에서 업계관계자들은 “소재기업들의 원천기술 보유는 글로벌시장까지 선점할 수 있는 주요한 요소로서, 앞으로도 기술전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코오롱은 세계최고 제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NASA로부터 상을 받은 것 외에도 국내의 소재분야에서는 꾸준한 기술개발과 양산화 성공으로 총 22건의 ‘IR52 장영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송 원장에게 장영실상은 코오롱이 소재기술을 바탕으로 세계의 다른 경쟁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우뚝서게 하자는 열망의 표상인 것이다.


‘다윈의 바다’에서 경험한 좌초와 항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가 담긴 종이 한장을 파일에서 펼쳐보여 주었다. 업무차 미국의 한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병원벽면 액자에 있던 글귀라고 한다.

< Winner와 Looser의 차이 >

승자는 모든 문제의 답을 구하려 하고,

패자는 모든 답에서 문제점을 찾으려 한다.

승자는 “그것이 어렵긴 하겠지만 가능하다고.”고 말하고,

패자는 “그것이 가능은 하겠지만 매우 어렵다.”라고 이야기한다.


송석정 원장은 직장생활 30여년 동안 주로 신규사업 관련업무를 도맡아 하면서 문제점보다는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난관을 피하기 보다는 도전을 즐기며 살아왔다.

어떤 일을 할 때 부정적인 마음으로 하면 잘못되기 십상이다. 꿈과 목표를 세우고 실행할 때는 그만큼의 긍정적인 태도도 똑같이 필요하다.

송석정 원장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신제품으로 기술사업화를 성공시킨다는 것은 성공확률 5%대 미만이지만 실패를 수용하는 기업문화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자신이 있을 수 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코오롱중앙기술원으로 오기 전인 2003년 초 그는 코오롱을 떠나 협력사인 피엔에스의 대표로 파견되었다. 화학사업 담당이사를 맡았던 그는 2000년 초 처음 2년간은 회사에서 제시한 목표를 무난히 달성하였다.

당시 맡았던 사업들이 초기단계라 규모가 작았지만 송원장은 회사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 신규사업을 더욱 크게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새로운 사업의 목표를 설정할 때 회사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목표를 설정했다.

실제 도달목표(Actual Goal)보다 한계 도달목표(Stretch Goal), 더 나아가 이상적 목표(Ideal Goal)를 설정하여 도전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목표만큼 성과를 내지 못했고 책임을 지고 회사를 떠났다.

하지만 코오롱은 8개월 후 다시 송 원장을 코오롱중앙기술원장으로 복귀시킨다.

코오롱 역사상 임원이 회사를 떠났다가 다시 등용된 첫 케이스이며 기술사업화의 실패를 기꺼이 수용하는 기업문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되었다.

송 원장으로서는 입사한 이래 가장큰 좌절과 성취를 동시에 맛보았던 경험이었다.

이 사건은 지금까지 11년 이상 원장으로서 봉직해 오면서 자신의 업무방식이 긍정적인 도전임을 확인시켜 준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네오뷰코오롱의 대표이사를 겸임하면서 신사업을 런칭중이다. 3년 전부터 수동형 OLED 제품의 자동차 헤드 디스플레이의 거리측정기 등 다양한 용도개발을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주력제품은 폴리에스터 필름, 석유수지, 에어백 산업용 소재인 화학소재이다.

다시 말해 회사 소재부품을 단순히 파는 것에 그치는 것이아니라 엔드유저인 소비자를 위해 또 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현재 그룹 매출은 11조원이며 이 중 코오롱인더스트리가 절반정도인 5조원이다.
 
송 원장은 네오뷰코오롱의 수동형 OLED를 반드시 성공시켜 디스플레이 분야의 선두주자인 머크, 코닝과 같은 세계적인 소재기업의 반열에 올리는 것이 소망이라고 전했다.

“기술로 사업을 하다보면 실패가 많습니다. 소재는 기본적으로 10년 내지 20년이 걸려야 그 열매를 맛봅니다. 도레이는 탄소섬유(Carbon Fiber)의 최강자인데, 1961년에 시작해서 상업적으로 꽃피운 것은 1990년대 후반입니다. 그쪽 사장님은 ‘우리는 선배들의 땀과 피로 얼룩진 열매를 먹고 있다.’라고 늘 말한답니다. LCD 유리의 최강자가 된 코닝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도 5개의 소재를 준비하고 있는데, 두세가지 나오는 데도 10년 이상이 걸렸습니다. 기술이 있어도 시장에 가서 현금으로 피드백되어 선순환이 되는데 오래 걸리는 것이 소재입니다.”

송석정 원장은 벽면에 걸려있는 사진 한 장을 설명해 주었다.

“저는 사진을 찍을 때 의도적으로 중앙에 섭니다. 그리고 연구원들한테는 RPM(Research(연구)-Production(생산)-Marketing(사업)) 순으로 그 중요성을 언급합니다. 이는 우리 어머니 세대에 면 양말, 면 옷들을 화학섬유로 대체하고자 벤처정신을 발휘했던 코오롱의 개척정신과 기술개발자로서 미래의 산업기술도 연구소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저만의 결심을 표현하는 행동입니다.”

“과거 면을 주로 사용하던 시대에 바느질하는 것은 참 고된 일이었지요. 코오롱은 나일론을 도입해 노동시간을 줄이고 시간적 여유를 주었습니다. 삶의 질을 올리는 데 기여한 과거의 코오롱이 벤처정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코오롱은 없을 것입니다. 소재회사도 을의 입장에서 벤처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슈퍼갑’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지요? 저는 소재회사가 늘 을이지만 ‘슈퍼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R&D로 ‘스마일 커브’ 만들기

송 원장의 집무실 벽에는 ‘심모원려’(深謀遠慮)라는 글귀의 액자가 있었다. ‘일을 할 때 깊게 꾸미고 멀리 생각하라’는 뜻이다.

“당시 ‘불칼’이라는 사장님을 모시고 연구소 기획팀장을 할 때였습니다. 하루에 숙제가 백여가지씩 떨어졌고 보고서는 수도 없이 검토하면서 꾸지람을 듣고 반려되고 수정되는 시절, 토요일·일요일 없이 일할 때였습니다. ‘신뢰, 협동, 창의로 보람의 일터를 만들자’고 하신 회장님께서 ‘일을 할 때 깊게 꾸미고 멀리 생각하라’는 말을 자주하셨지요. 붓글씨를 좋아하는 장인어른이 이를 듣고 써주신 글인데, 가슴에 새기기위해 액자에 담아 걸어두었습니다.” 그는 미래의 코오롱을 늘 생각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전체의 코오롱을 보기위한 ‘심모원려’는 멈추지 않고 있다.

“머크社의 액정, 코닝社의 유리, 바스프-다우社의 실리콘, 이형재 분야의 니코덴코社, 도레이社가 있습니다. 도레이는 ‘기술의 신’이라 불릴 정도입니다. 업계에는 이런 회사들에는 범접해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불문율 같은 게 있었지만 청개구리 기질이 있던 저는 도전을 했습니다. 이런 회사들을 뛰어넘는 코오롱을 만드는 것이 제 꿈입니다.”

그는 서재로 가서 자신이 필요하고 생각날 때마다 모아놓은 수십여권의 자료파일들을 펼쳐보였다.

그 중에 ‘스마일 커브’라는 한장의 종이가 눈에 띄었다.

“2003년 이후 다시 연구원으로 복귀한 후 원장으로서 지금까지 꼭 실천해온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신입연구원들이 교육을 받은 후 마지막 시간에 하는 과제발표의 장(場)에 빠지지 않고 참석한 것입니다. 9년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송석정 원장은 신입연구원들에게 그들의 판단력과 의사결정력이 증대될 수 있도록 선배이자 멘토로서 코치의 역할을 하고자 노력한다고 한다.

또한 소통과 협력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며, 연구원들에게 평론가 역할을 하지 말 것을 조언한다고 전했다.

“생각해 보세요. 400m 계주를 할 때 네명이 바통터치를 하는데, 아무리 유능한 선수라도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쉽지가 않습니다. 증가된 가속도로 달려오는 선수와 가속도를 일으켜야 하는 선수간의 미묘한 바통터치가 이루어져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Research가 양산기술로 전달될 때에도 마찬가지인데, 쉽고 편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중첩부분에서 원활히 소통될 수 있도록 생각을 공유하고 협력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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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치사슬 단계별 부가가치에서 R&D가 ‘을’이면서 ‘슈퍼을’이 될 수 있는 방법은 연구소가 어떤 역할을 가지고 헤쳐나가는지에 달렸다고 설명한다.

‘게임의 룰’을 변화시키는 지식기반경제에서의 성패(成敗)는 시장의 표준이 될 수 있는 가치있는 지식을 누가 먼저 창출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지식경제시대에는 가치사슬의 앞쪽인 R&D, 디자인, 핵심부품, 소재, 소프트웨어, 콘텐츠 개발 등의 활동과 뒤쪽에 위치한 마케팅, 토털솔루션 제공형태의 서비스 활동이 상대적으로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U자형 곡선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산업화시대에서 지식경제로 넘어가면서 가치사슬 곡선이 ‘역(逆) U자형’에서 ‘U자형’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사람의 웃는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스마일 커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모나리자 커브’라고도 하지요. 저는 지식경제의 시대에 ‘스마일 커브’를 만들기 위해 우리 연구원들이 해야 할 소중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기록과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송석정 원정은 그야말로 기록과 소통의 대명사이다. 주제별로 명함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담겨있는 십여권 이상의 명함집이 그 사실을 대변해 준다.

명함집은 다양성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했는데, 전국의 맛집 명함은 물론 외국 손님이 왔을 때 받은 명함에는 언제, 어느 나라, 좋아하는 음식, 취미 등을 명함 모서리에 빼곡히 기록해 놓았다.

날짜, 취미, 가족생활, 상대방의 특징을 메모해 놓으면 다시 만났을 때 매우 유용하게 활용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R&D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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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이라는 것은 방향을 돌리기가 어렵다.

소재분야의 회사에서 10년 이상 기술원의 수장으로 일해온 송석정 원장에게 기업연구소가 기술사업화 역량을 키워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한국에서 R&D문화라는 것은 예전에는 기호품과 비슷했습니다. 많은 국내의 경영자들은 ‘R&D란 밴딩머신에서 커피 나오듯이 사람을 집어넣으면 물건이 나오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저는 ‘연구원들이 주인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그래서 저는 연구원들에게 의도적으로 RPM(Research-Production-Marketing)을 강조하며 작은일이라도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흔히는 MPR을 말하지만, RPM을 강조하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송 원장은 연구원들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학습을 독려하고 정보를 오픈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구소에서 아무리 자신이 잘났어도 자신의 위치가 골목에 있다면 오픈된 자리로 나와 자신의 것을 공유하고 토론하여 결정하고 추진해야 합니다. 전체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중요한데, 활동을 일부 연구소만 하고 다른 부서가 모르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효율이 떨어지지요.”

또한 그는 연구소장들이나 기획자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연구소의 간부는 자신의 역량을 키우고 스스로 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조직이 죽습니다. 현장을 경험해 보고 그 특징을 파악해야 합니다. 본인이 틀 안에 갇힐 것인지 벗어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연구소장은 후배들이 지켜봅니다. 연구원들도 각도가 일, 이도 빗나가면 큰 오류가 생기는 판에 연구소장이 빗나가면 일은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커집니다. 전체를 봐주어야 부분에서 빈틈이 생겨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지요. 의도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다보면 큰 그림이 그려집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내 일이다’라고 한계를 그어버리면 실수가 생기고 그 실수는 블랙홀이 됩니다. 리더가 되었을 때는 스스로의 한계를 짓는 것을 경계하십시오.”

인터뷰가 끝날 즈음 입사시절부터 보관하고 있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연구개발활동, 가족을 위해 직장을 그만 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의 성장기를 보냈던 구미의 추억이 기록으로 남아 있었다.

코오롱에서 36년간 근무하는 동안 그는 당시만 해도 연구원들이 근무하기를 주저했던 구미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생산을 담당하는 현장의 공장과 연구소의 개발성과를 연결하는 데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는지가 삶의 증거로 고스란히 사진에 녹아 있었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 1988년부터 1992년까지, 1998년부터 1999년까지 구미에서 근무했고, 원장이 된 지금까지도 매달 한달에 한번 이상은 현장에 직접 방문하여 교류를 하고 있다.

아이디어가 기술이 되고 기술이 사업화되는 현장 속에서 겪은 송석정 원장의 경험은 많은 기술인들과 연구원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오늘도 R&D의 존재가치가 인정받을 수 있도록 장기적인 전략으로서 코오롱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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