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기술경영인인터뷰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 - 삼성전자(주) 김기남 사장

최고기술경영인 인터뷰에서는 기술경영인과의 대담을 통해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기술경영인의 역할과 리더십, 향후 계획 등을 알아봅니다.

삼성 반도체 성공의 신화
함께 한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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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작성_ 정원일 교수(경북대), 김공숙 전문작가(프리랜서), 이종민 과장(산기협)

대 담_ 김기남 사장(삼성전자(주))

오늘날 한국경제의 동력이자 삼성전자를 글로벌 기업으로 부상시킨 반도체사업이 삼성에서 시작된 지 약 40년이 흘렀다.

이 40년의 흐름 중 1981년부터 30여년 이상 자신의 청춘을 반도체산업에 바친 사람이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신화를 이룩한 주역의 한 사람인 김기남 사장(삼성전자 DS부문 메모리사업부장).

그를 만나 기술개발에 몸담게 된 배경과 역경을 딛고 세계시장에서 성공하기까지의 열정과 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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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주목하는 한가지 사실은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삼성반도체의 기술이 녹아있는 제품을 살펴보면 세계 1등을 고수해 온 이력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는 것이다.

DRAM은 1992년부터 22년 동안 세계시장의 41%를, NAND Flash는 2002년부터 12년 동안 40%를, DDI(Display Driver IC)는 2002년부터 12년 연속 18%의 시장을, Mobile AP는 2009년부터 72%를, Image Sensor는 2009년부터 26%의 시장을 각각 지배해왔다.

이렇게 줄기차게 혁신의 성공을 달려온 삼성전자 반도체의 DNA는 무엇일까.


반도체 분야, 도전과 성취의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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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남 사장은 강릉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 공과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였다.
 
당시 전자공학과는 인기학과여서 전국의 많은 영재들이 모인 곳이었다고 한다.

김기남 사장은 학부졸업 후인 1981년 삼성전자 산학장학생으로 한국과학기술원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석사과정 때 이미 삼성에 입사한 그는 졸업과 동시에 반도체사업부가 있던 부천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대다수 석사졸업생들이 박사과정에 진학하거나 대학의 교수직을 선호하던 상황에서 그는 다소 예외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가 정식근무를 시작한 1983년 3월은 오늘날 삼성의 운명을 바꿔놓은 중대한 일대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1983년 2월 8일 故이병철 선대회장은 오랜 고심 끝에 반도체사업 진출을 결심하였고 한 달 후 삼성은 반도체사업에 대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공표하였다.

하지만 재계와 업계에서는 ‘3년 안에 실패할 것이다’,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등 반대여론과 함께 냉소적 반응이 뒤따랐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반도체사업은 인구 1억명 이상, GNP 1만 달러 이상, 국내 소비 50% 이상이 되어야 가능한 사업이지만 당시 한국의 실정은 이중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관적인 여론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1983년 반도체사업 진출 선언과 함께 삼성은 첫번째 메모리 제품 사업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D램을 결정하고, 당시 세계 D램 시장의 주력제품인 64K D램 개발을 그 해 5월부터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 불과 6개월 만인 1983년 12월 1일, 국내 최초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면서 미국, 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격차가 났던 반도체 기술을 4년 가까이 단축시키는 쾌거를 이루어낸다. 이는 한국의 기술력을 세계에 보여준 기적과 같은 소식이었다.

또한 기흥 지역을 공장부지로 최종 확정하고 일반적으로 2~3년이 소요되는 공사를 착공 6개월 만에 완공하며 국내 반도체산업의 메카 ‘기흥밸리’를 탄생시킨다. 한국 반도체산업 역사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첫걸음이 시작되는 시기에 김기남 사장은 그 자리에 있었다.
 
당시 삼성은 64K D램의 호황이 끝나기 전까지 속히 시장에 진입해야 한다는 일념을 가지고 설계와 시공 등 모든 작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전략을 펼쳤다.

전 임직원이 일심동체가 되어 착공에 힘을 모으는 과정이었고 이때 김기남 사장 또한 1Mega DRAM 개발에 참여하였다.

당시 삼성은 반도체에 대한 기술이 부족하였기에 주변의 도움을 받아서 양산을 하게 되었고 삼성으로서는 더욱 더 미래의 독자기술 확보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오늘의 김기남 사장을 있게 한 기술개발활동에 정면 도전장을 던지는 일생일대의 사건이 일어났다.
 
삼성은 독자적인 1Mega DRAM 개발을 위해 두 팀을 구성하였다.

김기남 사장이 참여하는 국내팀과 미국 SSI회사를 중심으로 한 국외팀을 조직하여 서로 다른 기술을 개발시켰다.
 
당시 김기남 사장은 기술개발을 위해 1983년 가을에서 1984년 중반까지 현지 법인에 가서 10여개월 정도 개발활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돌아와 국내팀 스스로 독자개발을 위한 연구에 참여하였다.

“당시 전자공학자라고 해도 저처럼 석사 정도를 한 사람이 몇몇 있었고 미국 연구팀에 비해 이렇다 할 장비도없고 연구환경이 매우 열악하였습니다.

우리는 기술을 배워야 했고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개발방식이 양산에 성공할 수 있도록 모든 땀과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했지요.”

시간이 지난 후 미국의 SSI 회사와 국내의 김기남 사장이 참여했던 팀의 개발방식을 놓고 어떤 것을 양산에 적용할 것인지에 대한 최종적인 선택의 순간이 왔다.

둘 중 하나는 선택을 받고 하나는 버림을 받아야 하는 결정의 순간, 결국 당시 김기남 연구원팀의 방식이 채택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것이 선택되었습니다. 경쟁에서 이겼다고 보는 것인데, 생각해보니 우리가 만든 것이 기본적으로 양산과 연계하여 기초가 좋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게 일생일대 제일 중대했던 도전은 우리의 기술들로 제품이 생산되면서 자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1Mega D RAM 개발이었습니다. 결코 잊을 수가 없지요.”

이 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1M D RAM은 1988년도에 이르러 그때까지 5년 동안 삼성이 반도체사업에서 누적된 적자를 1년만에 다 갚고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분기점을 만들어 주었다.

세간에서 ‘삼성이 반도체 때문에 매우 어려울 수 있다’ 또는 ‘그룹이 휘청휘청할 수도 있다’는 염려가 많았던 시기에 삼성의 손으로 개발한 기술과 양산화는 매우 의미가 큰 것이었다.

“이렇게 기술자립을 할 수 있는 사업체를 만든 것이 계속 지속되어 64Mega는 세계경쟁에서 거의 뒤지지 않게 나왔습니다.

256Mega부터는 앞서서 나갔으며 1994년부터 우리가 1등을 하면서 지금 22년째 계속 1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1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하면 64K에서 1등한 회사가 256K에서 1등한 적이없고, 256K에서 1등한 회사가 그 다음에 성공한 적이 없는데 삼성은 1등 자리를 내어준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 1등이 시작된 계기가 바로 1M D RAM의 개발에서 출발했다고 봅니다.”


기술개발자로서 힘의 원천

김기남 사장은 1988년 이후 5년간 삼성에 근무한 후 회사의 지원을 받아 UCLA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하게 된다.

그는 5년간의 학위과정을 마친 후 다시 반도체로 돌아왔다.
 
김기남 사장처럼 흔히 말하는 성공의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은 어느 회사에서 근무하든지 그 자리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혼신의 힘을 다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하고 남는다.
 
김기남 사장은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왔는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안나카레리나의 법칙을 예로 들면서 겸허하게 답하였다.

“안나카레리나 법칙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면 돈, 종교, 자녀등 여러 요소가 다 맞아야 하는데. 이 가운데 하나라도 어긋나면 불행해진다는 법칙이잖아요?

초일류기업이 잘되려면 연구개발, 생산, 판매, 영업, 지원이 다 초일류가 되어야 합니다.”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서 자부심이 느껴지는 그의 답변이었다. 그리고 엔지니어로서 CTO가 되기 위해 청년 엔지니어들이 어떤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을지 질문해 보았다.

“저는 어느 사업이든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는 항상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항상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잘 볼 수 있는가 못 보는가, 잘 느끼는가 못 느끼는가의 차이지요.
 
‘한결같은’ 마음으로 전력투구해서 적어도 ‘10년 정도’ 할 수 있다면 어떤 분야이든지간에 성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 회사는, 우리 조직은, 뭐가 부족해서 안 됩니다’라는 말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본인이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가장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 ‘제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10년 정도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면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본인의 조직도 상당한 레벨에 올라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석·박사 엔지니어들에게도 격려를 잊지 않았다.

“엔지니어는 공장에서 겪어본 것, 중앙연구소에서 겪어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10년을 열심히 하면서 자신이 맡고있는 일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현장에서 매일 장비만 보고 있는 사람도 10년을 있다 보면 ‘이렇게 발전시켜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석·박사 인력들이야 말로 본인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고 또 해결해 나갈 능력도 있습니다.
 
‘한결같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믿고 ‘끝까지’ 할 수 있는 용기, ‘근본적’인 것에 대하여 질문할 수 있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김기남 사장은 ‘한결같은’, ‘끝까지’, ‘전심전력’이라는 단어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반도체 기술자로서 삼성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그가 말하는 단어들은 삼성전자 반도체 성공 DNA인 ‘반도체인의 신조’에 녹아있었다.

1983년 메모리사업을 시작하면서 아침마다 외치던 ‘반도체인의 신조’가 30여년이 흐른 지금, 세계 메모리반도체 1위의 성공 DNA로 자리잡은 것이다.

김기남 사장이 한국을 반도체 강국으로 이끌어온 반도체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가 다짐해온 신조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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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가지의 신조를 찬찬히 읽다보면 삼성의 반도체인들이 22년 이상 어떻게 세계에서 1등하는 제품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수긍이 간다.

세계 1등은 그냥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자신만의 신조로 DNA를 만들어 뼛속까지 체화시킨 한국의 반도체인들을 통해 우리는 일류의 영광을 유지하는 반도체 국가가 된 것이다.


삼성종합기술원과 김기남 CTO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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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부터 2012년까지 김기남 사장은 반도체연구소장과 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서 삼성의 기술개발 Think Tank를 이끌어 나가는 CTO가 된다.

CTO로서 가장 주안점을 두는 관리영역이 궁금했다. 그는 CTO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 여러가지 제한이나 제약을 둘 수 있다고 하였다.

“삼성종합기술원은 삼성의 미래를 책임지는 곳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일을 해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CTO로서 한 일은 연구원들이 많은 부분에서 도전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많은 책을 읽고 자료를 뒤지고 기록하면서 배워나갔습니다.

예를 들면 기술원에서 커버하는 부분들이 IT, 에너지, 바이오, 헬스로 다양하게 펼쳐져 있는데, 제가 모든 분야를 전문가처럼 알기는 어렵습니다.
 
나름대로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해나가면서 연구원들의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여러 분야에서 어떻게든 방향을 제시할 수 있고 자극을 주기위해 꾸준히 학습을 하였지요.”

“첫번째는 연구원들이 큰 목표를 가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나 공공연구기관이 유명한 과학저널인 네이처나 사이언스지에 논문이 나가면 신문지상에 대대적인 홍보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 종합기술원은 1년에 한두 편밖에는 실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목표를 정하고 저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이제는 종합기술원이 우리나라에서 네이처지나 사이언스지에 논문이 가장 많이 나오는 연구기관이 되었지요.”

“다음은 일에 착수하면 물고 늘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것은 어떻게 질문하고, 어떻게 자극을 주느냐가 젊은 엔지니어를 상당히 다르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기남 사장은 CTO로서 젊은 연구원을 육성하기 위해 격려보다는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이 과제의 한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론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당신이 연구하고자 하는 연구의 끝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보다 더 높은 목표와 도전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고 한다.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 거의 없지요.

내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하더라도 내가 하는 연구의 속도와 목표가 기존의 부분과는 다른 차별적인 가치를 가지도록 더 높은 목표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연구를 위한 연구를 하게 됩니다.”

김기남 사장은 열정적으로 연구원들을 독려했다. 삼성종합기술원에 있을 때를 회고하며 “저는 그 전에 있던 CTO들과는 좀 달랐기에 처음 1년여는 연구원들이 매우 힘들어했을 것입니다.

기술원에 가보니까 직원이 1,200여명 정도 그리고 과제 수가 110여개가 되더군요. 한 1년 정도 세미나를 하며 직접 모든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연구팀 중의 한명이 자신은 기술원에 십년 정도 있었는데, 원장이 기술적인 분야에 대해서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다고 하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더군요.”

김기남 사장은 삼성종합기술원이 국내 대학과의 산학협력을 위해 기초연구기금을 약 1조 5천억원 가량 조성하고 매년 1천 5백억원 정도를 사용하여 산학과제를 수행하도록 만들어놓은 후 종합기술원을 떠나게 된다.
 
현재 종합기술원은 에너지, 소재 분야로 특화하고 반도체연구소는 반도체에 집중하도록 해서 서로가 잘하는 분야에 경쟁력을 갖도록 하였다.

김기남 사장은 CTO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기술을 중심으로 한 사고체계’라고 강조하였다.

“CTO는 기술중심의 사고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CTO 역할을 하는 것인지 그냥 임원의 역할을 하는 것인지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좋은 CEO를 찾고 만드는 것도 어렵지만 훌륭한 CTO를 만들어내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지요.

어떻게 보면 CEO는 3년 앞을, CTO는 최소 10년 내지 적어도 30년을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많은 공부와 데이터도 필요하겠지만 CTO 본인이 보는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는 CTO로서 추구하는 관점에 대해서 단순명쾌하게 설명하였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제품을 개발하는 삼성은 앞서 말했지만 전체가 다 초일류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CTO로서 추구하는 관점이 있는가라고 물어보는데, 삼성은 기술을 바탕으로 사업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것이 기술개발입니다.

기술개발이 되지 않으면 영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잘할 수 있고 더 빨리 확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잘할 수 있는 기술개발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김기남 사장의 말을 들으니 문득 삼성반도체인의 신조라는, ‘큰 목표를 가져라’라는 말이 떠올랐다.


반도체인으로서의 일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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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남 사장은 반도체인으로서 자신의 일과 생활은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라고 겸손하게 답했다.

과거 그가 서울대에서 가장 커트라인이 높았던 전자공학과에 입학해보니 고등학교 때에 1, 2등을 하거나 예비고사 랭킹이 최상위였던 친구들이 다 모여 있었다.
 
55명 동기생 중에 현재 46명 가까이가 학교에 봉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당시 회사로 간다고 했을 때 대다수가 ‘왜 회사로 가느냐?’라고 반문을 했다고 한다.

“생각해 보세요. 저는 반도체에 와서 30여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반도체산업은 어마어마한 속도로 성장했습니다.

교육기관에 근무했다면 일정한 속도로 성장하는 조직이기에 변화나 성장의 폭이 적었겠지요. 지금 와서 모두들 대단한 결정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저는 운이 좋았다고 봅니다.

흔히 혹시 힘이 들어 다른 직업에 눈을 돌린 적은 없는지 묻습니다.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시작할 때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한 5년 동안 어려운 데서 시작하다 보니까 ‘아! 회사는 어려운 데구나. 죽자 살자 해야 되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습관으로 인이 박혔다고나 할까요?

지금은 다르겠지만 그 때 반도체하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바탕이 있었으니까 오늘이 있는 거지요. 물론 어려운 점은 많았지만 직장생활을 기흥에서 시작할 무렵부터 아침일찍 출근해 저녁늦게 돌아왔는데, 이게 습관이 되어서 지금도 그렇게 근무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초창기와는 달리 현 시대의 직장인은 환경이 다름을 인정하고 일정 선을 그었다.

“우리가 직장생활을 시작할 때에 국민소득이 2천불이었고 지금은 2만 5천불입니다. 우리 관점으로 지금 젊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어폐가 있지요.

우리 때보다 어렵지 않으니까 헝그리 정신은 떨어지지만 대신 국제적 감각, 높은 외국어 수준을 갖춘 점 등 장점도 많습니다.”

김기남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장실 큰 창 밖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새로 지은 이 건물은 삼성반도체종합연구동 빌딩으로 올해 3월 12일 입주식 행사를 마쳤는데, 빌딩 이름이 삼성전자 DSR동이다.

DSR은 ‘Device Solutions Research’의 약자로, 메모리와 S.LSI사업부, 생산기술연구소 연구원들이 한곳에 모여근무하게 될 새 보금자리이다.

김기남 사장은 가장 눈에 띄는 곳이 피트니스센터라고 했다.

일과생활의 균형을 고려하는 시대적 환경에 발맞추어 연구동내 피트니스센터는 체계적인 트레이닝을 위한 기구와 트랙이 모두 완비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건강관리센터, 열린 상담센터, 근골격 예방 운동센터 그리고 넓고 쾌적한 식당이 임직원의 건강을 든든하게 책임진다고 한다.

달라진 시대에는 달라진 관점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가족들과의 여가나 취미생활을 할 여유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일 때문에 개인생활이 희생했다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