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US ESSAY - 사기史記가 주는 감동과 교훈
과학기술정책의 콘트롤타워인 미래창조과학부가 출범한 지도 1년이 훌쩍 지나갔다. 새로운 미래 먹거리를 창출하고 창조경제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상상력과 창의성에 바탕을 둔 창조경제론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인의 창의와 열정이 한껏 발휘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시계추를 되돌려 올바른 역사서를 쓰기 위해 자신의 열정을 바친 한 역사가의 삶을 반추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 주인공은 중국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마천(司馬遷)이다. 그는 기원전 2세기 때 사람으로 우리에게는「사기」(史記)로 친숙한 인물이다.
서양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투스보다 약 3세기 정도 후대의 사람이다.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싼시성 황성현 출신으로 10세에 고전을 암송했고 20세 때 천하를 유람하여 고적과 풍속을 살폈으며 전설을 채집했다고 전해진다.
BC 108년 역법 개정작업에 참여하여 장기간 누적된 과오를 바로잡고 태초력(太初曆)을 편찬하였다. 여기까지의 그의 삶은 다른 사관(史觀)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BC 99년 이릉(李陵) 사건에 뜻하지 않게 연루되면서 그의 인생은 180도 급반전한다. 이릉은 한 왕조의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로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에 종군하여 흉노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불행히도 흉노의 맹공세에 포로가 되었는데, 사마천은 무제에게 이릉이 중과부족으로 부득이 항복하였으므로 관대한 조치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무제의 역린(逆鱗)을 건드린 그에게 떨어진 것은 가혹한 처벌뿐이었다.
그에게 주어진 선택은 세가지였는데, 첫째는 스스로 자살하는 길이요, 둘째는 거액의 속죄금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고, 셋째는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궁형(宮刑)의 치욕을 감수하는 길이었다. 빈한한 그가 돈을 낼 수가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아버지의 유언을 저버리는 불효의 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중국 역사를 정리할 것을 당부하였다.
“내가 태사령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천하의 역사를 폐기하고 말았다. 내가 죽으면 너는 아버지의 뜻을 잊지 마라.” 아버지가 남긴 유언이었다.
그는 제대로 된 역사서를 쓰기 위해 형여지인(刑餘之人; 거세형벌을 받은 자)으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였다.
사기는 선비의 굴욕을 위대한 사서(史書)로 승화시킨 책이다.
“선조를 욕되게 하는 것만큼 추한 행동은 없으며 궁형만큼 치욕적인 굴욕은 없다.”
“내가 당한 수치를 생각할 때마다 등에 식은땀이 흥건하게 흘러내려 옷을 적시곤했다.”
“초고를 다 쓰기도 전에 이런 화를 당했는데,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가 사형을 기다리는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자신의 처절한 심정이다. 위대한 역사가의 울분에 찬 절규다.
북송의 재상 구양수(歐陽脩)는 「사기」를 분노에 차서 쓴 발분지서(發憤之書)로 평가하였다. 이는 이후 「사기」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평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사기」는 절망의 책인 동시에 명예회복의 책이다. 그는 “정본은 명산에 비장하고 부본은 장안(長安)에 두어 후세의 성인군자를 기리고자 한다.”고 저술의 의미를 밝혔다.
“정말로 만일 이 역사서를 완성하여 유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내 몸이 여덟으로 찢긴다 하여도 결코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 있는 내용이다.
「사기」는 중국 24 정사(正史) 중 가장 오래된 책이다.
또한 반고의 「한서」(漢書) 및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과 더불어 가장 널리 읽히는 사서이다.
완성하는 데 20년 넘게 걸린 노작으로 「신당서」(新唐書) 17년, 「자치통감」 19년, 「한서」 20여년에 버금간다. 1~3년 사이에 졸속으로 편찬된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 「원사」(元史)와는 비길 바가 아니다.
「사기」는 다른 정통사서와 달리 애증의 감정표현이 풍부하다. 문체도 뛰어나 후세 사서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53만자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며 본기(本紀), 표(表), 서(書), 세가(世家), 열전(列傳)으로 구성되는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기원이 되었다. 본기, 세가, 열전은 사마천의 독창적 창조물이며 「사기」의 중심이다.
본기는 황제를 다루었는데, 황제가 되지 못했지만 사실상 황제 지위에 있는 인물도 포함시켰다. 항우 본기가 탄생한 연유다.
이는 그의 현실주의적 역사관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한고조 유방 사후 16년간 천하를 다스렸던 그의 황후 여후(呂后)도 본기에 포함시켰다.
일개 서민에 불과한 공자를 공자세가로 다룬 것도 대단한 파격이다. 공자가 중국 사회에 미친 커다란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의 선견지명에 놀라울 뿐이다.
뭐니뭐니 해도 「사기」의 백미(白眉)는 70편 열전이다. 백이(伯夷) 열전으로 시작된 열전은 역사의 주역이 보여주는 장엄한 인간드라마다.
시대에 저항해 굶어죽은 백이와 숙제, 오왕 부차, 월왕 구천의 시대를 휘저은 복수의 화신 오자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주인공 한신 등 역사의 주역이 리얼하게 묘사되고 평가된다.
열전은 공신, 군인뿐 아니라 유협, 자객, 상인 등 다양한 인간군상을 조명한다. 그는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을 인간으로 보고, 인간의 존재를 형상적으로 묘사하였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와 진말한초(秦末漢初) 시대는 개성있고 실력있는 개인의 역량이 맘껏 발휘된 시대다. 「사기」는 일반 민초(民草)의 시각에서 서술된 민중사(民衆史)이기도 하다.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덧붙여있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이 살던 시대배경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역사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현 하나하나가 살아움직인다. 한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자객 열전에서는 진시황 살해에 실패한 형가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다가온다. 오자서 열전에서는 한많은 인간의 고통이 절절히 전달된다.
사기에는 자유인인 사마천의 자부심과 결기가 도처에서 느껴진다.
황제 앞에서 이릉을 변호하는 지식인의 용기, 어떠한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킨 인간의 모습이 각인된다. “사람은 언젠가 한번 죽는다.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는 반면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도 있다.” 일본의 시인 미키기요시(三木淸)는 “의인이란 누구인가. 분노할 줄 아는 자다.”라고 하였다.
역사를 쓰는 일로 자신을 지킨 사마천의 자유의지는 시공을 초월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