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Plus Essay - 인생 여든의 변(辯)

PLUS ESSAY는 사회저명 인사가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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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강연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강연은 “물이 좋아요?, 불이 더 좋아요?” 그리고는 “물이 무서워요? 아니면 불이 더 무서워요?” 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 답은 다 다르다. 그런데 “나는 물불 가리지 않아요.”라는 만만치 않은 답이 나오기도 한다.
 
물의 가치나 불의 가치를 대등하게 느끼면서 물과 불 어느 것이나 좋은 점과 나쁜 점 등 그 특성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불을 더 중요하게 여겨왔다.
 
나는 경북 구미의 한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 당시 내가 살던 시골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저녁 때 책을 읽으려면 등불(호롱불) 같은 기름에 불을 붙여 밝게 해야만 했다. 책읽기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이 등불이 정말 소중한 것이었다.
 
이 등불이 에너지라는 것을 안 것은 이 때보다 훨씬 훗날이지만 이 불이 나에게는 대단히 소중하여 내가 “불이 좋은가? 물이 좋은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나는 “불이 더 좋다.”고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에너지(Energy)는 원래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인데, 중국에서는 에너지를 ‘능원’(能源)이라고 표기한다. 우리 인간은 에너지를 연료인 석유, 석탄, 가스 등의 자원 개념에만 많이 익숙해 있다.

나도 자원 개념의 에너지를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을 택했다. 이것이 에너지를 공부한 까닭이다.
 
이러한 연유로 신재생에너지(주로 태양에너지)를 연구하고 그 기술을 우리 인간생활에 적용시켜 환경을 보호하는 데도 도움이 된 연구로 ‘최우수논문상’도 받았으니 나는 전공을 잘 선택하였다고 생각한다.
 
자기 소질을 빨리 파악하여 계속 노력하면 뜻을 이루게 돼 꿈이 성취된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우리나라는 자원이 없는 나라임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 특히 한반도 남쪽에는 에너지 자원이라고는 전무하다.
 
그러나 석유 자원은 없지만 우리나라는 고래(古來)로부터 금수강산이라 칭해졌다. 그리고 아름다운 나라이다. 아시아 여러나라가 지진, 태풍 등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를 보는가!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는 안전하니 조물주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물질문명의 발달과 고도화된 생활의 편의를 추구한 탓에 에너지 수요가 지나치게 많이 요구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에너지 과다소비로 인한 석유부족 때문에 1973년 1차 오일쇼크(석유파동), 1979년 2차 오일쇼크를 겪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원자력에너지와 신재생에너지의 요구가 더 절실하게 되었다.

에너지와 환경은 동전 앞면과 뒷면의 관계처럼 상호 밀접한 연관이 있기에 에너지가 이렇게 많이 소비되는데 환경오염이 안될 리 없다.

나는 에너지와 환경분야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기 위하여 2000년도에 한국자원재활용기술연합이라는 비영리 사단법인을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맡아 필요한 곳에 기술을 적용, 전수하였다.
 
당시 단체 창립행사 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환경비서관을 시켜 축하메시지까지 보낼 정도로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에너지 절약과 환경보호가 세계적 이슈가 된 후 1995년 11월 베트남 정부가 우리 정부에 ‘에너지종합계획’을 수립해 달라는 요청을 해와 나는 우리 정부측 관계자와 약 2주간을 하노이에서 체류하면서 ‘베트남에너지종합계획(안)’을 수립해 주었다.

그리고 1996년 8월에는 산유국인 이란에서 에너지 진단요청을 받아 약 4주간 이란 석유화학공업단지 ‘이스판 복합단지’의 에너지를 진단해주고 그 대책을 제시한 바 있다.
 
이 에너지 진단에 우리나라 에너지관리공단 전문요원 5명과 같이 불철주야 노력한 결과, 그 석유단지에서 연간 약 4천톤의 이산화탄소를 감축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와 같이 내가 가지고 있는 전문기술을 베트남과 이란 등 외국에까지 시대적 요구에 기여하는 기술을 제공하여 큰 보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가 많을수록 개인도 개발되고 국익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 월간조선 > 1997년 3월호 “미래를 준비한 朴正熙(박정희)의 未完成(미완성) 프로젝트”를 읽어본 이는 2010년 3월 26일 밤 천안함 폭침원인을 알게 될 것이다.
 
소급하면 1973년도 석유파동 이후 다시 닥칠 수도 있는 에너지 위기에 대비하고 경제성장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대표적 산유국인 사우디와 경제협력을 취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는 안보라는 개념으로 ‘안보경협’을 추진했고 성공단계에서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의 서거로 이 모든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는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크나큰 프로젝트의 미완성이었다. 한편, 군사안보 측면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미완성 프로젝트는 “악어계획”을 들 수 있다. 이 계획은 적 잠수함을 정확히 발견하여 공격하는 무기개발 계획이다.

< 월간조선 >에 상세하게 게재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 프로젝트의 중심에 있었던 나는 그 미완성 프로젝트를 완성된 프로젝트로 성공시켰다면 천안함 폭침과 같은 사건을 미연에 방지했을 뿐만 아니라 1996년 9월 17일 강릉 앞 바다에 출몰한 북한 잠수함 침입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러면 여기에 그 “악어계획”을 요약해 본다. “악어계획”은 육영수 여사 서거 다음 해인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이 ADD(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하여 해군에 군적을 두고 있던 나에게 지시한 대잠수함 공격무기 개발계획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냉전은 종식되는 듯 하였으나 북한의 남한 적화통일 야욕에는 아무 변화가 없었으며, 우방인 미국도 극히 한정된 군사정보와 자료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던 때였다.

이 시기에 ADD에서 그 계통의 무기개발 책임을 맡고 있던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극도의 보안 속에서 음향식 어뢰를 개발하였다.
 
그 당시 미국에서는 2급으로 분류된 무기기술을 획득할 방안이 없어 일본 군함에 장착시킨 데 성공한 일본 K제작소 도움으로 그 예비설계를 확보하고 한국 해역에 적합한 어뢰 제작도면 작성에 성공하였다.

그 때가 1976년 상반기인데, 청와대의 격려와 독촉으로 시제품 제작에 성공하고 우리 해군의 지원 아래 진해만에서 실험폭파에 성공한 때가 1976년 5월 20일 오전 11시.
 
진해만에서 이렇게 성공한 어뢰는 음향식 어뢰이며 그 당시 우리 국방기술로서는 음향식 기뢰는 물론이고 접촉식 기뢰, 압력식 기뢰, 자기식 기뢰 그리고 그 어떤 종류의 어뢰나 기뢰도 생산능력이 없었다.
 
다만 미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 등 선진국만의 특권처럼 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시기였다. 특히 음향기뢰는 해상방어에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되므로 전략무기로 분류돼 최우방 미국도 우리에게 그 기술이전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의 감시망 속에서도 자주국방의 원대한 계획을 실천중이던 박 대통령은 본 “악어계획”을 극도의 비밀을 유지해가면서 실천케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악어’ 양산(量産)을 보지도 못하고 박 대통령께서는 서거하고 말았다.

물론 박 대통령 서거로 이와 관련된 모든 계획이 미완성으로 중단돼 버렸다.
 
박 대통령의 미완성 프로젝트는 이것만은 아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1970년대가 고난의 시기였고 무기개발과는 인연이 없는 듯했다.
 
당시 주한 미 미사일부대는 이미 완전철수한 상태이고 미 지상군 1만 7천명도 철수를 시작하고 있었다.
 
한편 월남은 이미 공산화돼가는 시점에 한국에서 핵무기 개발을 완성시키고 1981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핵무기 개발성공을 공포하려고 한 그 원대한 극비의 모든 계획은 역시 미완성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뒤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핵심적이고 결정적 프로젝트는 대부분 미완성으로 끝난 것들이 많다.

목숨걸고 나라 걱정한 인걸이 떠난 지 반세기가 되어간다. 나는 그래도 살아 있어 이렇게 ‘인생 여든의 변(辨)’ 원고를 쓰고 있다.

한편, 나는 당시 그와 같은 노력으로 대통령표창과 국민훈장을 받았으며 여전히 대한민국 과학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