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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 R&D에 대한 믿음이 후지필름을 살렸다

- 기존 기술역량을 기반으로 사업 다각화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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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을 생산하던 회사가 화장품을 만든다고?”

세계 3대 필름회사인 후지필름이 2007년 화장품 사업진출을 발표했을 때, 업계의 반응은 차가왔다. 내부에서도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후지필름이 만든 화장품’ 이라는 광고를 앞세운 여성용 화장품 ‘아스타리프트’가 시장진출 3년 만에 소위 대박을 터뜨리자, 우려는 곧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급격한 디지털의 물결 속에서 140년 전통의 필름회사인 아그파와 코닥이 맥없이 줄줄이 쓰러졌지만 후지필름만은 위기 속에서 변신의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후지필름 선진연구소의 야마다 스미토(Yamada Sumito) R&D총괄본부장은 ‘R&D에 대한 믿음’ 덕분이라고 말한다.



기존 연구성과의 폐기 대신 재정비 택해

후지필름은 1990년대 후반에 내부적으로 필름산업의 쇠퇴를 예견하고, 장기적인 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논의했다. 시장 변화의 큰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후지필름의 전망이 다소 낙관적이었다는 점이다. 후지필름은 필름산업의 변화가 적어도 20년 이상 완만하게 일어날 것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후지필름의 기대와 달리 2000년대 들어 필름시장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 야마다 스미토 후지필름 선진연구소 R&D총괄본부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2000년부터 필름 매출이 매년 20 ~ 30%씩 감소하면서, 조직 차원에서 대응이 어려운 상황이 전개됐다.

그야말로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에 직면했고, 결국 준비 없이 디지털 시대를 맞이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여파로 후지필름의 매출액은 매년 감소해서, 2008년 2조 8,000억엔에서 2012년에 2조 1,950억엔 규모로 감소했다.
(<그림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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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익도 크게 떨어져서 2010년에는 사상 최초로 420억엔의 적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림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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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필름이 강도 높은 조직개편에 착수한 것은 2003년에 들어서다.

당시 ‘제2의 창업’을 모토로 R&D 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이 이뤄졌는데, 그 목적은 크게 3가지 방향으로 하여, 기능 중심으로 전개됐다.

첫째, 현재 영업과 직결된 기술의 개발과 둘째, 첨단기술 확보, 셋째, 기반기술 확보가 그것이다.

이에 따라 이머징 마켓 진출을 위한 R&D를 강화함으로써, 저가디지털카메라, 디지털LED프린터 등의 개발에 나섰다. 또한 글로벌 R&D정책을 강화하여, 해외현지 연구를 활성화했다.

현재 네덜란드 필버그 연구소와 가스분리막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US, UK 등과 연계해서 잉크젯 시스템을 공동연구하고 있다.

기존에 확보한 기초기술을 바탕으로 평판디스플레이, 헬스케어, 화장품 등으로 사업 다각화도 시도해왔다.

또한 R&D 전략상에도 보다 시장 친화적인 방향으로 개편했는데, R&D부터 상품화로 이어지는 여러 단계를 축소하고,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지휘명령계통을 단순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이를 기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선진연구소’를 설립했다.

주목할 점은 이런 일련의 변화 속에서 후지필름은 R&D의 감축 대신 유지를 택하고,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찾았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 야마다 스미토 본부장은 “경영상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후지필름은 R&D가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라는 확신으로 투자를 계속 유지해왔다.”고 설명했다.

또한 “2000년 이후 엄격한 시장 환경에 직면하여 활로를 모색한 결과, 기업의 장래를 보장하는 것은 결국 ‘기술’ 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따라서 우리가 보유한 모든 기술력과 지혜를 모으기로 했고,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선진연구소다.” 라고 선진연구소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실제 최근 후지필름은 매출액대비 R&D 투자 비중을 2007년도 수준인 연 7 ~ 8%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같은 추세는 적자를기록했던 2010년에도 계속되었다.
(<그림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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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필름의 변신 배후는 ‘선진연구소’

호사가들은 후지필름이 2003년 필름사업의 대대적인 감축과 함께 R&D 조직의 개편에 착수했을 때, 관련 연구인력의 방출이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후지필름은 그동안 축적한 연구성과 의 폐기가 아닌 재정비와 활용을 선택했다.

전국에 산재해있는 필름 · 소재 분야의 기존 연구인력을 한데 집결하여 ‘선진연구소’를 설립하고 신사업 발굴의 임무를 맡긴 것이다.

2003년에 착수하여 2006년에 문을 연 선진연구소에 집결한 연구원은 총 500명에 달했다. 선진연구소 설립 목적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제2의 창업을 모토로 추진하는 신사업 진출의 기초기반기술 확보를 위한 기존의 연구역량 결집이다.

둘째, 계열사인 후지제록스의 인쇄기술과 토야마화학(2008년 인수)의 신약개발 기술을 효과적으로 흡수 · 활용하기 위한 별도의 R&D조직의 확보이다.

셋째, 기술 융합을 위한 독립적이고 새로운 연구조직의 확보이다. 선진연구소의 연구분야는 크게 4개 분야이다.

첫째, 첨단코어기술연구로 미래 유망기술 분야를 선도적으로 연구한다. 둘째, 유기광합성연구로 첨단코어기술에서 필요한 소재를 개발하는 임무를 띠고 있다.

셋째, 인쇄마킹연구소는 상업인쇄(옵셋인쇄)를 대체하는 잉크젯 인쇄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의약헬스케어 분야는 화장품을 비롯해 건강보조제, 혈액분석기기, 항암제 등을 개발하고 있다. 모두 후지필름이 신사업 영역으로 야심차게 진출하는 분야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선진연구소는 새로운 R&D 목표 달성을 위해 기존 기술력을 융합연구로 수행하고 시너지 효과 창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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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합연구를 위해 벽을 없앴다

선진연구소는 연구공간부터 특별하다.

기존의 R&D 역량을 모아 새로운 것을 창출한다는 설립취지를 살리기 위해 선진연구소는 꼭 필요한 부분 외에는 벽을 없앴다. 그나마 대부분의 벽은 안이 훤하게 보이는 유리로 되어 있다.

심지어 ‘대거실’ 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연구실은 칸막이조차 없다. 연구실이라기보다는 강당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마음만 먹는다면 대거실에서 일하는 200명이 어떤 상태인지 한눈에 볼 수도 있다. 연구원 사이의 원활한 ‘소통’을 통해 ‘융합연구’를 촉진하기 위해서다.


선진연구소 전경 및 내부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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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신원확인을 하고 연구실에 들어선 사람은 어디든 갈 수 있고, 누구든 만날 수 있고, 어디에서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한다는게 구조의 컨셉이다.

선진연구소는 공중에서 내려다봤을 때 알파벳 ‘A’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건물 중앙에 조성된 ‘안뜰’을 중심으로 사방의 유리벽을 통해 반대편의 연구실이나 회의실이 훤하게 보인다.

또한 사방 곳곳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다. 휴게공간과 자료실의 역할을 하는 ‘날리지 카페(Knowledge Cafe)’는 물론이고, 복도를 비롯해 유휴공간은 모두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해 언제든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처럼 독특한 연구공간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 연구원들의 의견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후지필름은 20 ~ 30대 젊은 연구원 10명을 선발해서 전문 디자이너와 함께 연구공간 설계에 참여시켰다.

선진연구소가 사용하는 예산은 한해 500억엔 정도이다. 2008년 이후 지속되는 매출액 감소에도 불구하고 후지필름은 R&D에 대한 투자를 2007년 수준인 매출액 대비 7 ~ 8%를 유지하고 있다.

2010년에는 사상초유의 적자를 겪고도 R&D 투자는 평년수준을 이어갔다. R&D가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 요소라는 경영진의 확고한 신념 덕분이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선진연구소는 필름개발 과정에서 획득한 콜라겐 제어기술을 활용해 아스타리프트라는 화장품을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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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리프트는 2010년에 일본 내에서만 2,0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후지필름 회생의 견인차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전체 매출에서 화장품을 비롯한 건강관련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40%에 이르고 있다.

외에도 기존 옵셋인쇄를 대신할 수 있는 잉크젯프린터, 휴대용 핸드폰의 액정에 채용할 수 있는 투명전도필름 등의 성과를 내고 있다.

후지필름 선진연구소의 성공요인은 기존 연구역량을 재배치하고 집결함으로써 R&D의 효율성을 높이고, 융합연구를 통해 신사업 창출의 기반기술을 확보하고, 빠른 의사결정을 통해 R&D 결과의 상품화에 ‘Speed’를 높인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후지필름의 시도를 성공으로 결론내기에는 아직 이르다.

현재와 같은 수준의 높은 R&D 투자가 가능한 것은 엔화 강세의 영향이므로, 향후 R&D 투자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내부적으로도 회의가 일고 있다.

그러나 유사한 위기에 봉착했던 아그파나 코닥 등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후지필름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본 글은 2012년 11월 8일부터 10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일 CTO포럼의 일환으로 후지필름 선진연구소 방문결과를 정리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