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CH ISSUE 02

줌인리포트 - 금성볼트공업㈜ 김선오 대표

매년 30% 성장, 볼트 너트
최고 기업이 되겠습니다

볼트와 너트는 단순해 보여서 이를 사업화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오해다. 종류가 많다 보니 연구개발을 더 많이 해야 하며, 대량으로 생산하므로 품질에 더욱 철저해야 하기 때문이다.

1978년 3평짜리 가게, 자전거 한 대로 출발해 국내 내로라할 보트 너트 제조사로 자리매김한 금성볼트공업㈜ 김선오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글 정인수(프리랜서)
사진 황남수(창해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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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 회사를 살렸다

부산시 사상구 괘법동의 산업용품산업단지에는 각종 기계 용품을 취급하는 회사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서문 근처에 자리한 금성볼트공업는 업력 34년으로 이곳의 터줏대감이라고 부를 만하다.

김선오 대표는 24세의 약관의 나이에 3평 밖에 안 되는 작은 점포에 자전거 한 대로 출발했지만 현재 국내 볼트와 너트 분야에서 금성볼트공업을 내로라할 중소기업으로 성장시킨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이렇게 회사가 성장한 것은 약속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입니다.”

김 대표는 기업을 경영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며 첫 운을 뗐다.

약속을 지키는 회사, 노력을 하는 회사, 창조를 하는 회사, 이 세 가지가 금성볼트공업의 사훈인데, 그 중에서도 약속이 가장중요하다는 것이다.

회사가 무너질 뻔한 위기도 그 때문에 넘겼다.

1990년대 말 불어닥친 경제위기 때 기아자동차가 현대자동차에 인수되었는데, 당시 금성볼트공업은 기아자동차의 협력업체였다. 대기업이 무너지면 협력업체들도 대거 도산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일.

그러나 당시 업무 인수인계 과정에서 누군가가 ‘금성볼크공업은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회사’라며 협력업체를 유지해야한다고 말해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거래처가 어렵다고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저버릴 수는 없죠. 어려울수록 돕는다는 생각으로 1만 개 주문하면 1만 5,000개를 납품했어요. 모두들 저더러 미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다 쓰러져가는 회사에 그렇게 해주면 어떻게 하냐고 하더군요. 하지만 보십시오. 많은 협력업체가 문을 닫았지만 금성볼트공업은 이만큼 더 성장했잖아요.”

김 대표는 그 일을 겪은 뒤로 약속을 지키는 것을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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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간 오로지 볼트와 너트 만들기에 최선을
다해 온 금성볼트공업 김선오 대표

 


볼트와 너트, 쉬울수록 연구개발에 주력해야 해

일반인의 눈에 볼트와 너트는 단순해 보인다. 긴 봉 끝에 나선형 홈이 파여 있는 것이 볼트이고 그것을 조이는 작은 것이 너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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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른 분야보다 연구개발은 덜 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라고 물었더니 김 대표는 손사래를 빠르게 여러 번 쳤다.

“볼트와 너트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자동차, 컴퓨터, 핸드폰 등 우리 주변의 모든 기계에 쓰이는 게 볼트와 너트예요. 그래서 기계분야의 꽃이라고도 하지요. 쓰임새가 많으니 오히려 연구개발도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쉬워 보이니까 더 연구개발을 해야지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중소기업이다 보니 연구소는 비교적 늦은 2007년에야 설립했다.

그러나 회사 설립 때부터 꾸준한 연구개발을 통해 이미 중소기업청 100PPM 인증, 한국능률협회 ISO9000 인증, KS인증, 현대기아자동차 SQ 인증 등 각종 품질인증을 획득하였다.
 
특히 볼트의 머리 부분을 절삭, 용접하여 작업의 자동화 및 균일한 품질유지를 할 수 있는 ‘머리 절삭 기계장치’를 볼트업계 최초로 개발해 원가절감은 물론 생산성 향상도 이끌어냈다.

또한 볼트 너트로 155mm 자주포의 국산화에도 동참했으며, Ball STUD 일체형 및 용접형 가공설비에서는 특허를 획득하는등 17개의 산업 재산권을 보유하여 기업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연구개발비는 매출대비 약 5% 수준이에요. 하지만 부속되는 비용까지 합산해보면 15%는 될 겁니다. 예를 들어 한 제품을개발하려면 금형설비도 바꿔야 하는데, 그 비용도 상당 부문은 연구개발 때문에 발생하니까요.”

그는 연구개발비를 나라에서 지원받기 위해 숫자를 고치는 기업도 있는 것 같다면서, 옳지 않은 일을 계속 해나가는 기업은결국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회사를 경영한다는 것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므로 외형보다는 내실에 충실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회사는 인생연마, 기술연마를 하는 곳

모든 중소기업들이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인력수급이다. 볼트와 너트만을 생산하는 금성볼트공업은 이 부분이 더욱 어렵다.

다른 업종보다 철저한 장인정신이 요구되는 분야이며 금속을 다루는 것이니 만큼 힘도 많이 드는 것이 사실.

김 대표는 요즘 젊은이들이 편한 일만 좇는 것을 개탄해 한다. 특히 기계공고와 상고가 많이 사라진 것이 인력난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인력수급은 어렵지만 일단 직원이 들어오면 교육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김 대표의 말이다. 외부 전문기관에 보내기도 하고 사내에서 자체교육을 하기도 한다.

김 대표는 특히 회사 내의 교육이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회사는 단순한 돈벌이 장소가아니라 인생을 배우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

“회사는 학교입니다. 기술도 배우고 인생도 배우는 곳이죠. 우리 회사 경영이념을 그래서 인생연마, 기술연마라고 정했지요.”

그리고는 빼곡하게 글자가 적힌 작은 노트 한권을 펼쳐보였다.

“이것은 제 일기장입니다. 여기에는 직원들에게 해 줄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노트에는 매일매일 일어난 것, 생각한 것을 적어 놓았는데, 책에서 본 구절이나 신문에서 찾은 구절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하루에 신문을 8개나 보고, 책도 자주 보는데, 신문을 보다 필요한 부분은 스크랩도 한다.

이렇게 하면 같은 내용을 서너 번이나 보는 셈이니 자연스럽게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이 몸에 쌓인다. 그리고 그것을 직원들이나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그런 일을 30년 동안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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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연구소장협의회 회장 감투 쓴 이상 열심히 할 것

최근에 김 대표는 영남연구소장협의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직원뿐만 아니라 회원 기업들도 챙기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영남연구소장협의회는 3여 년 전 김선오 대표가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는데, 초반 15개 업체에 불과하던 회원 수가 2012년에는 86개로 부쩍 늘어났다.

회원이 늘어나자 강력한 리더가 필요하다며 고문으로 참가하고 있던 김 대표를 적극 회장으로 추대했다는 것이다.

“세미나와 단합대회는 물론 각 업종에 대한 최신 정보도 나누고 있어요. 전체 모임은 격월로 갖고 있으며, 간부 10여 명은 매월 모입니다. 이왕 감투 쓴 것 열심히 해야죠.”

중앙회 이사로도 활동 중이라서 서울 중앙회 모임에도 참석하는 그는 “영남연구소장협의회가 이제는 자리를 잡았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작은 보람이라고 한다.

회원 수를 100개로 늘이는 것이 올해의 남은 목표.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협의회의 활성화라고 이야기 한다. 단순히 친목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협의회로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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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계속 봉사하고 있으니 회사도 잘 될 것

김선오 대표는 부산에서 내로라할 일꾼이다. 경찰서와 구치소, 소방서, 자유총연맹, 세무서, 검찰청, 환경청, 로터리 클럽 등 공적인 성격을 띤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오륜정보고등학교를 찾아가 어려운 환경에 있는 청소년들을 돕고, 유엔공원에서 어린이 글짓기, 그림대회를 열기도 한다. 국가 안보나 청소년을 위한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것.

그 결과 2003년에는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으며, 올해에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했고, 각계각층으로부터 받은 수상과 감사장만 해도 100개는 족히 될 정도가 되었다.

옆에 있던 직원은 “사회봉사 활동 줄이시고 회사일 더 해주셨으면…” 하면서 볼멘소리를 하지만 웃는 걸 보니 오히려 “우리사장님 정말 대단해요.” 라는 자랑임이 분명하다.

“바로 이것 때문이에요.”

김 대표는 손을 들어 보였다. 오른손에 손가락 하나가 반쯤 없다. 그는 젊은 시절 군대에 가기위해 신검을 받았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때문에 면제 판정을 받았다.

이후 두 번이나 더 자원입대를 신청했다. “이것 없어도 운전에는 자신 있습니다.” 그는 운전이라도 하겠다며 떼(?)를 쓰기도 했지만 오히려 담당관의 말은 “군대에 봉사하고 싶은 것을 사회에서 하라.”는 것이었다고.

그때의 경험이 주변에 눈을 돌리게 했고, 어디든 국가 안보와 관련되는 곳이면 찾아다니게 하였던 것이다.

“남들은 제게 무슨 꿍꿍이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저는 있는 그대로에요. 순수한 마음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고 하는 것이죠.”

김 대표의 말 속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또한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는 첫 마디가 떠올랐다. 그는 그때 사회에 봉사하며 살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고, 지금까지 30여 년을 하루 같이 그 약속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앞으로 회사의 비전을 물어보았다.

볼트와 너트는 언제까지나 계속 필요할 것이고, 회사도 한 걸음 한 걸음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는 것이 답변이었다. 그리고 이어 “제가 사회에 봉사하는 한 우리 회사는 잘 될 겁니다.” 란다. 단순하면서도 확신에 찬 대답이다.

인터넷 시대에 아직도 신문을 스크랩하고, 핸드폰에 연락처를 저장하는 대신 수첩에 빼곡하게 전화번호를 써 넣고 다니는 김선오 대표, 그런 그에게서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감성을 지닌 따뜻한 인간애가 묻어난다.

그가 있으니 금성볼트공업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욱 밝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