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열쇠 - 문화를 품은 기술, 기술을 품은 문화
기술로서의 기술은 한계가 있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인간중심으로 가지 못하면 쓸모없는 기술로 버림받고 만다. 현 시대의 기술은 사람과 그 사람의 환경, 다시 말해, 문화를 품지 못하고서는 버틸 수 없다.
문화를 품은 기술, 기술을 품은 문화를 위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어디인가?
휴머니즘으로 가는 기술
조약돌과 나뭇잎이 늘어져 있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이 곳. 여기는 숲 속이 아니다. 국내 최대의 휴대폰 제조사인 삼성전자가 최신형 스마트폰을 소비자들에게 공개하는 장소의 모습이다.
이날 행사장에서는 더 빨라진 CPU, 선명해진 디스플레이 등 고사양 하드웨어에 대한 자랑은 뒷부분에 배치하고, 그 대신 인간 중심의 디자인과 사용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센서에 주력해 설명했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고, 인간을 위해 디자인했다(Inspired by Nature, Designed for Humans)’라는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운 스마트폰답게 제품에 대한 설명도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춘 셈이다.
삼성전자가 행사장에서 내내 강조했던 ‘당신을 이해하는 스마트폰’이라는 말은 이제 첨단 제품이 ‘기술 스펙’으로 승부하는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선언과 마찬가지다.
사람을 이해하는 기술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휴대폰 광고에서 볼 수 있는 대표 문구는 ‘가장 얇은 제품’, ‘넓고 선명한 대화면’, ‘빠른 처리 속도’ 같은 기능 중심의 문구들이었다.
하지만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애플 창업자 故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세상에 내놓은 이후 휴대폰은 더 이상 최첨단 모바일 기술의 집약체로만 인식되지 않는다. 이용자의 개성을 담고 스토리를 표현하는 문화 양식이 되었다.
아이폰 쇼크 덕분에 세계 휴대폰 시장에도 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동안 기술경쟁에 매몰돼 있느라 사람에 대한 이해,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방법에 대한 고민은 다소 부족했다는 것을 반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반성만 한다고 인간 중심의 창의적 R&D가 이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구실 안에만 갇혀 있는 기술을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내 상상력으로 다듬어주기 위해서는 기술과 보다 친숙해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미래를 선도할 창의적 기술
이를 위해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은 기술문화 기반 조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다양한 기술을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융합형 인재양성을 위한 환경 조성에 힘쓰고 있다.
아파트 같은 생활 공간 주변에 유소년들이 공작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술공작실을 만드는 ‘창의공작 플라자’ 사업이 대표적이다.
스티브 잡스는 어린 시절부터 집에 있는 차고에서 공구를 이용해 물건을 만들어보면서 미래의 꿈을 키웠고, 미국의 J.J. 에이브람스 감독은 어렸을 때 8mm 비디오카메라로 이것저것 찍어보고 편집한 경험 덕분에 드라마 ‘로스트’ 같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입시 위주 시스템 때문에 학교에서 제대로 된 기술 교육이 충분히 이뤄지지 못하는 형편이다. 하지만 창의공작 플라자 프로그램은 실습과 체험 위주로 이루어져 있어, 참여해 본 학생들은 물론 기술교사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다.
학교 안에서도 기술을 활용한 창의적 교재와 콘텐츠를 개발하려는 노력과 함께, 기술교사들의 재교육을 통한 역량 강화도 시급하다.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이 참여해 설립한 과학기술 교재 개발 기관 NSRC(National Science Resource Center)가 좋은 예이다.
이야기가 있는 기술
이밖에 일상적으로 산업 기술을 체험해 볼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단순히 기술만 전시해 두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그 속에 숨어 있는 이야깃거리를 함께 보여주는 공간은 기술에 대한 이해도와 흥미를 높이는 기회를 선사한다.
프랑스에 있는 산업기술사 박물관인 ‘라빌레트’는 기술전시와 함께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일반인들이 많이 찾는다.
대한민국이 무역 2조 달러, 소득 4만 달러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 및 산업기술계에 새로운 생각과 아이디어를 발산시킬 수 있는 창의적 문화가 필요하다. 이러한 창의적 문화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 기술에 감성을 덧입힌 킬러 콘텐츠가 나올 수 있다.
창의적 문화는 금세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융합형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체험형 기술교육 환경을 조성하고, 인문학과의 융합이 자연스러운 기술문화를 사회 전반에 확산시키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기술문화와 관련해서 정부가 투자하는 예산은 올해 기준으로 교육과학기술부가 전체 R&D 예산의 2.1%, 지식경제부는 0.2% 수준에 불과하다.
문화를 포용하는 산업기술에 대한 관심이 더욱 많아지고, 융합형 인재를 키우자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