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02

불확실성의 시대 R&D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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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를 통한 기술 진보는 호황이든 불황이든 경제적 여건과 관계없이 이뤄진다.
 
즉 시장여건과 관계없이 기술 침체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R&D를 통한 진보의 기회는 한번 놓쳐버리면 되찾기가 힘들뿐더러 영원히 경쟁력을 상실할 수 있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경영환경이 악화된 시기에도 R&D를 비용이 아닌 ‘투자’로 보고 기존의 지출수준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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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기 R&D 축소, 영원한 기술 격차로 남아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는 장수기업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사람의 수명은 늘고 있지만 기업의 평균 수명은 오히려 점점 짧아지고 있다.
 
Bain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30년을 버틴 기업들은 전체의 30%도 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 설립된 기업들 가운데 현재 상위 20위 안에 남아있는 기업은 30% 미만이다.
 
경영환경이 복잡해지고,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현대 기업의 장수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기업이 장수하기 위해서는 변동성이 심한 시기에 살아남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단순한 생존은 진정한 의미의 장수가 아닐 것이다.
 
모든 기업이 높은 보수를 지급하면서 전문 경영진을 두는 이유도 단순한 생존이 아닌 지속적 성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성장에 대한 비전이 없다면 젊은 인재를 유치할 수도 없고, 상장기업의 주가에도 악재로 작용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기업의 지속적 성장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Harvard Business Review와 Bain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평균 약 13%의 기업만이 연간 5.5% 이상의 성장을 실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림1>에서 보듯이 매출 규모 5억 달러 이상의 기업 가운데 인플레이션 수준인 5.5% 이상 성장하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림1 지속적인 성장을 하는 기업의 희소성을 나타내는 연구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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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업이 수익을 내는 순탄한 경영환경에서는 성장을 위한 투자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경영환경이 악화되거나 경기침체기인 경우에는 불행히도 대부분의 기업들이 R&D 지출을 줄인다.

경영진은 R&D 지출을 축소하면서 여건이 개선되면 다시 투자를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R&D 투자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다.

한번 줄인 R&D 지출을 다시 늘려 경쟁사의 투자수준을 따라잡는 것은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경영환경이 좋은 시기와 그렇지 않은 시기에 AMD와 Intel사의 R&D 지출을 비교해보면 두 기업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발견된다(<그림2> 참조).


그림2 AMD와 Intel의 R&D 투자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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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금융위기 이후 90년대 중반부터 경기가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AMD는 금융위기 기간 동안 Intel이 집행한 투자수준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R&D에 있어서 만큼은 경쟁사뿐만 아니라 시간도 경쟁의 대상이다. 즉, 타이밍을 놓치면 다시 궤도에 오르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R&D 투자에서 흥미로운 점은 여건이 좋을 때만큼이나 그렇지 않을 때에도 R&D를 통한 기술 진보는 이뤄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R&D에는 기술 침체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R&D를 통한 진보의 기회는 한번 놓쳐버리면 되찾기가 힘들뿐더러 경쟁력을 영원히 잃게 된다.

R&D와 관련된 또 다른 흔한 오해는 M&A를 통해 R&D 역량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많은 임원들이 자본여력이 있으면 R&D에 직접 투자하기 보다는 다른 회사의 R&D 부서를 인수하려고 한다.

그러나 R&D M&A는 인수 후 효과를 100% 실현하기 어렵다.
 
R&D 역량은 회사가 아닌 사람에 내재된 것으로 R&D 부서의 인수 후 통합 과정에는 매우 세심하고 배려 깊은 관리와 탁월한 HR 스킬이 요구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기업들이 통합에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우수한 인재를 경쟁사나 다른 기업에 잃고 만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이고 사실상 유일한 방법은 경영환경이 악화된 시기에도 R&D를 비용이 아닌 ‘투자’로 보고 기존의 지출수준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기업이 엄청난 비용절감과 성과개선 압박에 놓이는 시기에 이를 실행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성공적인 R&D 투자의 요건

그렇다면 성공적인 R&D 투자의 요건은 무엇일까?
 
첫째, CEO의 마인드로 비즈니스 세계를 이해하는 유능한 CTO이다.
 
훌륭한 기술 전문가가 CTO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마치 아무리 훌륭한 의사도 병원장으로서는 부적절한 경우와 같은데, 그 이유는 각 포지션에서 요구되는 스킬이 다르기 때문이다.

CTO는 예산 책정 과정에서 적절한 정치적, 사업적 스킬을 발휘해야 하고, R&D 프로젝트를 우선 순위화하여 조직에 적절히 제시함으로써 R&D의 모멘텀을 유지하고 다른 임원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 요건은 프로젝트의 성과다. 추가 R&D 예산을 요청하기 전에 기존 프로젝트들이 원활하게 수행되고 있는지 확실히 해야 한다.
 
R&D 예산을 확대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더 나은 결과나 더 나은 생산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만약 R&D 투자의 결과가 규모와 비례한다면 대기업들만이 우수한 R&D 프로젝트의 결과로 우수한 제품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점이 명확하게 나타나있다.

프로젝트와 특허수는 중소기업들이 더 많다. 중소기업의 R&D 예산 규모는 작아도 히트 제품이나 의미있는 기술 진보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적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R&D에서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는 것은, R&D에 사활을 걸고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대부분 R&D에 대한 열정이 중소기업만큼 높지 않기 때문에 엄청난 R&D 예산을 투자하고도 그에 걸맞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 또한 대기업의 R&D 인력이 최적의 인재가 아닌 일반적인 샐러리맨의 마인드를 가진 직원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절대적인 예산의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적절한 영역을 선별하고, 최종적인 성공을 책임질 인재를 배치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세 번째 요건은 사업과의 연계성이다.
 
종종 R&D와 사업을 별개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치 제품 출시 과정에서 제품생산과 마케팅을 별개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R&D가 현업과 가까워지지 않으면 궁극적으로는 서포터를 잃게 된다.
 
복사기의 왕이라 불렸던 Xerox의 사례를 보자. 복사기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특허를 보유하고 있었고 높은 수익성을 자랑한 기술 중심의 조직이었던 Xerox는 결국 조직규모가 방대해지면서 부주의로 인한 실패를 겪고 말았다.

Xerox는 가정용 프린터 기술을 개발한 적이 있다. 아이디어 자체는 매우 혁신적이었으나 가정용 프린터 시장의 현실화 가능성에 의구심을 두었던 마케팅 조직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마케팅의 지원 없이 기술을 끝까지 추진할 수 없었던 R&D부서는 결국 이 기술을 포기하고 HP에 매각했다.

그 결과 우리가 지금 잘 알고 있는 대로 HP가 Xerox의 기술을 토대로 가정용 프린터 사업을 시작했고, 가정용 프린터 시장은 금새 수십억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정용 프린터는 Xerox의 소형 프린터까지 대체하기 시작했고 이 기술을 최초로 개발했던 Xerox는 결국 파산에 이르렀다.
 
Xerox의 이러한 실패가 단순히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Xerox의 마케팅 담당자 탓일까? 마케팅부서가 제품과 마케팅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조기에 충분히 커뮤니케이션하지 못한 R&D부서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요건은 R&D 인력 및 자원의 확보와 개발에 있어 미래의 과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미래의 과제란 신사업, 신기술을 소개할 때마다 내부적으로 확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상이한 스킬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

과거에는 많은 서양 사람들이 한국 기업이나 브랜드를 모르거나 신뢰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국 기업에 취직하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현재 유럽의 경기침체로 인해 조기퇴직하거나 해고된 많은 R&D 인력들이 한국 기업에서 일하겠다는 의향을 갖고 있다. 앞으로 한국 기업들은 이와 같은 추세를 적극 활용할 기회를 탐색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삼성전자의 성공 스토리에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2000년대 초 닷컴 버블이 붕괴되었을 때 삼성은 서구에서 신규 인재 풀을 적극적으로 확보했다. 이중에는 무직 상태의 재미교포 엔지니어도 많았다. 이러한 황금기회를 포착함으로써 삼성전자는 우수한 엔지니어를 대규모로 확보할 수 있었다.

만약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면 인력 격차를 채우는 데 수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이는 요즘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는 많은 한국 기업들에게도 좋은 시사점을 제시한다.

성공적인 R&D를 위한 마지막 요건은 오픈 마켓 이노베이션이다.

오픈 마켓 이노베이션(Open Market Innovation : OMI)은 특정 문제에 대해 이미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 연구한 기관이 이 정보를 외부와 공유할 의향이 있고 이를 매력적이라고 판단하는 기업이 이 정보를 사들이는 경우를 가리킨다.

OMI가 성립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첫째, 기업은 이를 통해 세계적 수준의 아이디어에 접근할 수 있고, 내부 역량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하다.

둘째, 비교우위가 있는 영역에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함으로써 핵심사업을 강화하고 지적자본을 제공할 수 있다.
 
셋째, 적합한 내외부 고객을 파악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넷째, 중복되는 노력을 줄이고 격차를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다.

끝으로 유능한 직원의 이탈을 방지하고 재투자에 필요한 현금을 창출할 수 있다.


그림3 개방형 혁신이 확대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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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OMI의 장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중요한 사실은 이미 많은 기업들이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기술에 투자하고 있는 많은 벤처 투자자들은 기업의 R&D 임원들보다 기술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고 적극 관여하고 있다. 즉, 특정 분야에서 벤처캐피털의 지식수준이 훨씬 높기때문에 많은 기업들은 당연히 이를 활용하고자 한다.
 
Bain의 조사에 따르면 벤처캐피털은 광범위한 기술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일반 기업 대비 4배나 높은 생산성 수준으로 특허를 등록하고 있다.

R&D 인재를 오랜 기간 동안 유지하고자 하는 기업들의 바람과는 달리 R&D 직원들이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이들 직원과 함께 회사가 보유한 지식도 빠져 나간다는 점이고 이를 막기 위해 회사에서는 거액을 제시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한 리크루팅 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R&D 직원이 새 직장에서 연구 중인 아이디어 중 80%는 기존 직장 혹은 업계에서 연구했거나 관련된 것이었다.

즉 ‘새로운’ 아이디어가 아니라 기존에 참여했던 연구 프로젝트의 연장선이거나 거기에서 파생된 아이디어인 것이다.
 
따라서 ‘자체개발 기술’은 어쩌면 바람일 뿐 이를 오랜 기간 동안 실현하기는 어렵다. 즉 기술정보는 언젠가는 유출되기 마련이다.

신기술을 개발했을 때 개인적인 자부심을 갖겠지만 사실 실질적인 노하우는 협력업체의 것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기술을 온전히 소유한다는 것은 100% 보장할 수 없는 일이다.
 
Bain의 연구에 따르면 중소기업들의 특허와 기술 건수가 대기업 대비 3배나 많다. 이 모든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미 경쟁사들이 OMI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혼자 도입하지 않는다면 경쟁에서 불리해질 수 있을 것이다.

최근 Yet2.com과 같은 오픈마켓 특허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아직 초기단계이기는 하나 한국과 아시아에서도 유사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이미 P&G나 3M과 같은 미국 대기업도 인트라넷(Intranet)을 사용하여 자사의 R&D 활동을 공개하고 외부 기관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등 훨씬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방법으로 OMI를 활용하고 있다.

또한 정보공유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R&D 분야에서 최대 잠재치를 실현하고 있다.

마이크로 복제(Micro Copying) 기술에 OMI를 적용한 3M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OMI 추진과제를 통해 신호등, 마우스 패드, 기저귀, LCG 디스플레이 등에 마이크로 복제 기술을 확대 적용했고 이 기간 동안 매출은 2억 달러에서 1,000억 달러로 늘었다.

P&G 역시 8,000명 이상의 엔지니어와 19개의 R&D센터로 이루어진 방대한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현재 R&D 활동의 60% 이상을 미국 외 지역에서 수행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거의 100%미국 내에서만 진행되던 R&D 활동의 네트워크를 전 세계로 확장함으로써 진정한 글로벌 R&D를 갖춘 기업이 된 것이다.